13.12.19
~~아하목사의 행복편지~~

“내 인생의 책,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4)”

[MC]
목사님, 강연 잘 들었습니다! 저는 이 책을 읽고 나서 “정말 어렵다” 라고 느꼈는데 목사님 강연 듣고 나니까 작가가 여기에 이런 의미를 숨겨놓았구나 싶은 것이요, 재미있게 들었습니다. 오늘 저희와 함께 깊이 있는 책 이야기 나눠주실 두 분 모셨습니다. 한국 외국어대학교 김수환 교수님 그리고 강유정 문화평론가 나와 주셨습니다.

어떠세요? 강 선생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읽어 보시면서 그리고 목사님 강연 들으시면서 ‘아~ 이런 면은 나와 비슷하네’ 했던 캐릭터 있으세요?

[강유정]
이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보면 독자분의 나이와 성별에 따라 끌리는 캐릭터가 조금씩 다른거 같아요. 저와 같은 젊은 2~30대 여성들이라면 아마도 이반에게 더 끌리지 않나 싶습니다. 왠지 창백한 지식인 이라는 느낌이 들고요, 묘한 매력이 있는 인물이지 않나 생각됩니다.

[MC]
아, 그럴수도 있겠네요. 김 교수님은 강연 어떻게 들으셨나요?

[김수환]
작품 속 인물들이 내 안의 또다른 나를 재발견하게 한다는 목사님 말씀이 너무도 좋았습니다. 사실 러시아의 사상가 바흐친이 한 말이기도 한데요, 도스토옙스키의 모든 인물들은 다름 아닌 ‘인간 속의 인간’을 주장하는 자들입니다.

나이와 성별에 따라 조금씩 다른 독해가 가능하다는 강유정 선생님 말씀도 십분 공감합니다. 모든 고전이 그렇지만, 특히 이 작품은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그리고 세상을 보는 시각이 달라짐에 따라 끌리는 캐릭터가 달라지는게 특징이고 더욱 재미가 나기도 합니다.

‘반항하는 영혼’의 상징인 이반의 캐릭터는 사실 작가 자신의 청년시절 모습 자체이기도 합니다. 노년의 작가는 이미 그로부터 한참이나 멀리 벗어나 있지요. 어쩌면 우리 독자들도 작가 자신이 그랬듯이, 처음에 이반에게 강하게 매료되었다가 서서히 그를 ‘극복’해 가는 게 아닐까하는 생각이 듭니다. 저 역시 그랬구요.

물론 이 작품에서 도스토옙스키가 희망과 기대를 담은 ‘미래’의 인물로 그리려 했던 건 막내 알료샤입니다. 문제는 거기에 이르는 길이 결코 쉽고 평탄하지 않다는 겁니다. 드미트리와 이반을 안 거치고는 결코 알료샤에게 다다를 길이 없으니까요.

[MC]
등장인물의 개성도 강하고, 등장인물의 대화나 행동이 굉장히 구체적으로 묘사되어 있어서 놀랐는데요, 그만큼 인간의 심리를 잘 아는 작가가 아닌가 생각이 들어요. 일각에서는 도스토옙스키를 심리학자다 라고 얘기하기도 하잖아요?

[강유정]
맞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도스토옙스키는 자신은 심리학자가 아니다 라고 얘기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등장인물들의 대화나 행동을 보면 각 인물의 심리상태를 너무도 정확히 알 수 있는 부분들이 많습니다.

[MC]
그런데, 저는 궁금 했던게 왜? 이렇게 이름이 많은지요? 한 사람의 이름이 보통 2~3개로 불리잖아요? 드미트리는 미챠, 알렉세이는 알료사 이렇게 다양한 이름 때문에 책에 집중하기가 굉장히 어려웠어요.

[김수환]
사실 그건 러시아 소설의 특징입니다. 러시아에서는 이름이 세 부분으로 불려지고 있는데요, 가령 도스토옙스키의 풀 네임은 “표도르 미하일로비치 도스토옙스키”이지요. 공식 석상이나 서로 격식을 차리는 관계에서는 이름을 쭈욱 같이 붙여 부르고, 가족이나 가까운 친구 사이엔 그냥 이름만을 부릅니다.

그런데, 또 거기에다가 러시아 이름엔 ‘애칭’이라는 게 있어요. 이름을 친근하게 줄여 부릅니다. ‘미챠’, ‘알료샤’... 이런 식으로요. 이런 방식에 익숙치 않은 독자는 읽다가 보면 누가 누군지 헷갈리는게 당연합니다^^

재미있는 사실은요, 소설 전체에 걸쳐서 둘째 아들 이반은 애칭인 ‘바냐’로 불리는 경우가 단 한 번도 없다는 점입니다. 그가 얼마나 ‘도도한’ 왕따인지가 여기서도 드러난다고 할 수 있겠지요.

[MC]
아~ 생각해보니 그렇네요. 주요 인물 외에도 주변인물들의 역할도 상당히 큰거같아요.

[최일도]
그렇습니다! 이 책은 주요인물 표도르와 그의 아들 넷 뿐만아니라 조시마 장로의 비중이 아주 엄청나게 큽니다. 그리스도의 제자로써 그리스도의 성품을 나타내는 역할인데요, 알료사의 영적 멘토로써 매우 감동적인 이야길 많이 해주고 있지요. 평생 잊지 못하는 한 대목이 있습니다.

“여러분, 서로 사랑하십시오! 그리고 더욱 씨알들과 민초들을 사랑하십시오! 우리가 여기, 이 울타리 안에 틀어박혀 있다고 해서 속세에 있는 사람들보다 더 거룩하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아니, 오히려 여기 온 사람들은 누구나 이곳에 왔다는 사실만으로도 자기가 속세의 누구보다도, 또 이땅 위에 사는 그 누구보다도 못하다는 것을 깨닫고 살아야 합니다.”

[김수환]
목사님께서 말씀해주신 조시마 장로의 반대편에 서 있는 인물이 있다면 그건 아마도 스메르자코프가 아닐까 싶습니다. 아버지의 진짜 살인자인데, 스메르쟈코프는 이름 자체에 이미 ‘죽음’이라는 단어가 들어가 있을 정도로, 아마 전 세계 문학을 통 털어서도 손에 꼽을 만큼 ‘인상적인’ 악당의 캐릭터 아닙니까?

그런데 그 ‘악함’이라는 것이 말 그대로 무섭고 끔찍한 어떤 것이 아니라 약간 다른 종류의 것입니다. 뭐랄까...우리 인간들 각자의 내면 깊숙한 곳에, 가장 밑바닥에 깔려 있는 제일 저열하고 어두운 본성이라고 할까요...그런 어떤 것을 끄집어내서 대면하는 느낌이 듭니다.

사실 스메르쟈코프가 제일 가깝게 지내는 인물이 둘째 이반인데요. 나중에 이반은 스메르쟈코프가 자신이 가진 어떤 면이 뒤틀려 나타난 ‘분신’ 같은 존재라는 걸 깨닫게 됩니다. 그걸 깨닫는 순간 이반은 악마의 환영을 보게 되고, 결국은 미쳐버리게 되지요.

늘 그렇듯이 도스토예프스키에게서 선인과 악인은 따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인간 내부에 함께 공존하고 있지요. 영화 <배트맨>에 나온 것처럼, 인간이란 본질적으로 ‘투-페이스’입니다. 그걸 제일 잘 보여주는 작가가 바로 도스토예프스키입니다.

[MC]
사실 책을 읽으면서 고전소설이 맞나? 라고 느낄만큼 이른바 막장 드라마 적인 요소가 많았던 거 같아요. 살인, 치정, 돈... 지금 당장 TV를 틀어도 볼 수 있는 소재들이잖아요?

[강유정]
그래서 이 소설이 오랜시간 사랑받는게 아닐까요? 사람들이 흥미있어 하는 요소는 시대를 막론하고 비슷합니다. 아들과 아버지의 유산 문제, 아버지와 아들이 한 여자를 좋아하고, 더 나아가 아들이 아버지를 죽였다는 패륜범죄까지.. 한 사건만 가지고도 충분히 한편의 드라마가 나올 수 있을 정도로 다양한 사건이 계속 발생해 긴장감을 줍니다.

[김수환]
동의합니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들은 기본적으로 ‘범죄소설’의 형태를 띠고 있고, 줄거리가 지극히 ‘통속적인’ 배경을 갖고 있습니다.

그런데 무엇보다 놀라운 점은 바로 이런 막장 드라마적인 줄거리를 통해서 정작 이야기되는 것이 ‘신은 존재하는가?’ ‘구원은 있는가?’ ‘인간은 과연 타인을 사랑할 수 있는가?’ 극도로 철학적이고 형이상학적인 내용들이라는 점입니다.

흔히 도스토예프스키 연구자들은 이를 ‘신문기사’와 ‘성경’의 이중성이라고 표현하곤 하는데요. 도스토예프스키는 평생에 걸쳐 성경말씀을 읽고 탐구한 사람이었지만, 동시에 신문에 난 특이한 범죄 사건들과 공판 기록들을 꼼꼼하게 스크랩하는 열렬한 신문 애독자이기도 했습니다.

인간과 세계의 본질에 관한 그의 모든 ‘철학적이고 종교적인’ 말들을 더욱 더 돋보이도록 만드는 것은 생생하고 구체적인 우리 삶의 ‘통속적’ 배경들입니다. 그리고 그 배경들 중에서 단연 으뜸이라면, 말할 것도 없이 ‘돈’이지요, ‘돈’입니다!

[MC]
저 역시 읽을때 돈에 초점을 맞춰서 보게 됐는데, 책에서 3000루블이 굉장히 많이 언급되더라고요. 읽으면서 도대체 3000루블이 얼마이기에 이러나 싶을정도였다.

[강유정]
도스토옙스키를 연구한 국내 학자분이 쓰신 책에 의하면 3000루블은 경제가치를 따졌을때 한 5~6000만원 정도된다고 해요. 그런데 그 가치보다 더 중요한건 이 3000루블의 역할입니다!

[김수환]
‘돈’의 문제는 작가 도스토예프스키의 전 작품에 일관되게 흐르는 중심 테마라 해도 과언이 아닌데요. 그런데 사실 돈은 그의 작품 뿐 아니라, 그의 인생 자체의 테마이기도 합니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도스토예프스키는 말 그대로 ‘돈을 벌기 위해’ 글을 썼던 작가입니다. 또 실제로 평생 동안 빚에 쫓겨 허덕이며 살았습니다. 도박으로 큰돈을 탕진했던 적도 여러 번이구요.

그의 육필 원고를 보면 제일 많이 나오는 낙서가 ‘돈 계산’입니다. 돈에 관해서라면 분명 그는 둘째가면 서러운 전문가입니다. 돈의 위력과 가난의 끔찍함에 관해서 역시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지요. 하지만 아무리 봐도 그가 돈을 ‘사랑했던’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래서인지 돈도 그를 별로 좋아하진 않았던 것 같아요.

그가 이른바 ‘돈 걱정’ 없이, 비교적 편안하게 창작에 몰두할 수 있었던 건 죽기 전 불과 몇 년 뿐입니다. 하지만 그 덕분에 우리가 이런 위대한 작품들을 여러 권 읽을 수 있게 됐으니 그건 축복이라 해야겠지요.

[최일도]
그는 돈을 사랑한 사람이 아닙니다. 돈을 사랑하는 것은 일만 악의 뿌리가 된다는 것을 몸으로 체험한 사람입니다. 저는 우리시대 목사의 한사람으로써 작가의 인간이해 뿐만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이해와 고백에 대해서 말씀드리고 싶어요. 영성적 관점으로 봤을 때 말입니다. 이 작품을 통해서 도스토옙스키는 과연 무슨 메시지를 전하고 싶었나?를 말이지요.

이미 말씀드린 것처럼 돈, 살인, 치정 이런 막장요소를 가지고 그 밑바닥에서부터 이걸 넘어서서 신에 대한, 그리고 인간의 구원에 대한 이야기까지 얼마나 설득력이 있고 흡인력을 이끌어내는지 우린 함께 감탄한 바 있습니다. 정말 대단한 작가로구나! 하는 감탄이 절로 나온다는 것이지요. 바로 도스토옙스키의 천재성이 여기서 나오는데요, 작품의 사실적 묘사와 그의 문학적 업적만이 아닙니다.

도스토옙스키가 이럴 수 있었던 것은 사형선고를 받고 총살 직전에 구사일생 살아나는 극적인 체험을 했기 때문입니다. 유배가서 강제 노동으로 처절한 고통을 받고 시달려도 보았습니다. 그는 머리로 관념과 추상으로만이 아닌, 온 몸으로 하나님을 체험한 작가이기에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이라는 불후의 명작을 남길 수 있었던 것입니다.

 

 

 

 

 

 

Posted by 다일공동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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