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일공동체]

다일공동체 영성수련회(다일영성수련)

"아름다운 세상찾기"에 대한 비방글을 보며 - 멋진비움 -


http://christustraeger.tistory.com/94

최일도 목사의 영성집회(다일영성수련)에 대한 이단시비를 보면서

 

미주 크리스찬투데이에 어느 사모와 목사가 최일도 목사의 영성집회(다일영성수련)에 참여하고 와서 이 집회에 대해 이단의혹을 제기하는 글을 올렸다. 최일도 목사가 교계의 유명인사이다 보니 파장이 좀 있는 것 같다.

 

최일도 목사의 집회에 대해 전모를 접해 보지 않은 상태라 단정지어 말하기가 좀 조심스럽긴 하지만, 일단 내가 이분들의 글에 대해 느낀 대체적인 인상은 이들의 의혹제기가 다분히 표피적이며, 자신들의 강한 선입견에서 비롯된 측면이 적지 않아 보인다는 것이다.

 

1. 최일도 목사가 자신을 북극성이라 칭했다?

 

언뜻 보기에 '두 증인' 운운하는 아무개 교주가 떠오를 수도 있겠지만, 두분의 글에 따르면 집회참가자들도 별칭을 사용했다. 집회에 별칭을 사용하도록 한 것은 다분히 익숙한 일상성으로부터 탈피하고 인도자의 가르침을 따라 새로이 자신을 돌아보도록 한 기제로 보인다.

북극성이라는 별칭을 썼다고 곧 교주가 된다며 참소하는 행태는 이를테면 '푸른나무'라고 필명을 쓰면 그 사람이 자칭 사람이 아닌 나무라고 했으니 사람같지 않다고 헐뜯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2. 예수님이 화를 내신 적이 있다? 없다?

 

이분들은 예수님이 화를 내신 적이 없다는 최일도 목사의 말을 꼬투리잡고 있다. 아마 성경해석이 틀렸다고 말하고 싶었던 것 같다.

 

예수님이 화내신 적이 있는가, 없는가? 두 가지 측면을 함께 생각할 수 있다. 있다고 한다면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의 거룩한 분노를 나타내는 기록을 가리키는 것이요, 없다고 한다면 이 분노는 사람을 죽이려는 악독한 육적 분노를 가리킨다. 최일도 목사는 당연히 후자의 뜻으로 말하면서 집회참석자들에게 육적 분노를 품을 일이 아니라고 말하고자 한 것이지 성전심판기사를 부정하려는 뜻이 아니었음은 물론일 것이다. 최일도 목사의 말은 더도 덜도 말고 이 상황과 의도에 비추어 알아들으면 될 성질의 발언이다.

 

이에 비해, 육적 분노를 품은 일이 분명 있는 참석자들 가운데 있었던 두분은 약속이라도 한듯이 이 말을 문제삼아 예수님을 로보트처럼 만드는 거짓된 가르침 운운한다. 이게 도대체 번지수가 맞는 얘기라고 생각하는가? 얼토당토 않은 비약에서 살벌한 속내가 풍겨난다는 게 슬플 따름이다.

 

3. '나는 누구인가'에 대해 '나는 용서받은 죄인 / 하나님의 자녀입니다'는 오답?


아마 이분들이 가장 강렬한 거부감을 표시하는 대목이 아닐까 싶다. 최일도 목사는 이러한 '모범답안'들을 두고 '이게 다 교회에서 세뇌시킨 것'이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우선 고려할 점은 집회에 참여한다는 것은 그 집회에 세팅되어 있는 소통방식을 받아들인다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소위 은혜받았다는 것은 집회의 소통방식을 통해 소통이 활발하게 되었다는 것에 다름없다. 아울러, 현재 한국교회에서 익숙하게 통용되는 방식의 집회가 반드시 성경의 정신과 일치하는 정답은 아니라는 점도 유념해야 할 것이다. 오히려 한국교회의 일반적인 집회방식이 심히 자본주의에 찌들어 있는 싸구려 영성을 부추기고 있지는 않은지 고민해 봐야 할 시점이기 때문이다.

 

최일도 목사의 영성집회(다일영성수련)는 일반적인 부흥성회나 사경회 혹은 기도집회와는 소통방식이 다르다. 별칭을 사용하는 세팅 자체가 그것을 드러내준다. 그러나 이것 자체로부터 선험적으로 비성경적이라고 매도할 수 없다. 적어도 해당집회가 세팅해놓은 소통방식과 그 기제의 맥락에서 소통과정을 되짚어 보아야 할 것이다.

 

최일도 목사는 마치 선승이 화두를 통해 수련생과 소통하는 것과 같은 소통과정을 의도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거듭 환기해 두거니와, 이를 '혼합주의'라고 성급하게 단정하고 매도하기 전에, 소통과정이 가리키는 바를 따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내가 보기에, 소통과정을 통해 최일도 목사가 의도했던 바는 이런 게 아닐까 싶다. 교회에서 일상적으로 통하고 있는 용서받은 죄인이나 하나님의 자녀와 같은 표현들이 실은 일종의 종교적 가면일 수 있다. 내가 그렇다고 공식적으로, 명목상으로는 굳게 믿고 있고 심지어 견고하게 내면화하기까지 하더라도 과연 실질적으로도 그런가? 아마 나는 결단코 실질에 있어서 정말 그렇고 추호의 거짓도 있을 수 없다고 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마르틴 루터가 격렬한 영적 순례를 거쳐 칭의의 복음을 통해 하나님과 화해한데 비해, 찌르면 툭하고 나오는 정식화된 후세의 문답은 일종의 자동화된 신(deus ex machina)과도 같아서 종교적 가면으로 오용되는 기제일 가능성이 높다. 한국교회에 그런 종교적 가면을 쓰고 다니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렇다면, 내가 용서받은 죄인 혹은 하나님의 자녀라는 답변이 세뇌에 따른 거짓답변일 가능성도 높다. 최일도 목사는 이런 밋밋하고 평면적인 기술방식에 의한 문제제기 대신 나름의 실험을 시도하고 있는 것 같다.

 

'당연한 모범답안'을 녹음기처럼 되풀이하기 전에, 그걸 녹음기처럼 되풀이하는 것을 세뇌라고 하는 데 반발하기 전에, 이 점을 돌아보는 게 이 집회에서 세팅된 소통과정에서 당연한 순서가 아닐까?

 

4. 혼합주의?

 

그렇다면 혼합주의에 대한 의혹은 어떤가?

 

- 우선, 최일도 목사의 집회에서 동양음악이 명상 혹은 묵상을 위해 사용되었던 것 같다. 이걸 두고 초혼음악 운운하는 것은 동양음악에 대한 모독이기도 할 뿐 아니라 중대한 거짓증언일 수 있다는 점을 지적해둔다. 왜냐하면, 그 음악이 정확하게 초혼을 위한 음악인지 확인해 보고 하는 의혹제기인가? 아니면 WCC에서 정현경이 초혼제를 지냈다는 얘기를 WCC에 가입한 통합교단 소속으로서 영성훈련집회를 한다는 목회자에 끌어들여 빨간 색깔을 덧칠한 것인가? 동양음악을 경건한 시간에 쓰면 안 된다는 신학적 근거는 도대체 무엇인가? 새벽기도 때 교회 음향시설에서 흔히 흘러나오는 세미클래식풍의 잔잔한 음악이거나 CCM이나 찬송가가 아니면 과연 혼합주의인가? 집회참가자가 동양음악을 듣고 익숙치 않아서 은혜가 안 되었다면 그건 그럴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러나 이걸 두고 혼합주의 운운하며 이단시비를 건다면 또 다른 차원의 문제가 된다는 점을 유념해야 할 것이다.

 

- 그렇다면 불교의 선문답이나 가톨릭의 영성수련에서 형식이나 내용을 따오는 것은 어떤가? 명백한 혼합주의가 아닐까? 오히려 나는 되묻고 싶다. 초대교회는 헬라사회에 유행하는 로고스론을 비롯한 수많은 종교적 개념을 수용했고, 아우구스티누스는 신플라톤주의를 수용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저주받은 이교도' 이슬람의 아베로이스주의적 주석을 통해 재발견된 아리스토텔레스철학을 수용했다. 어떤 사람들이 금과옥조로 떠받들고 있는 17세기 개신교 정통주의조차 종교개혁자들의 뜻에 거슬리게도 다시 이 아리스토텔레스철학을 수용했다. 이런 게 바로 혼합주의가 아닐까? 그보다도 성경으로 거슬러 올라가서, 사도 요한은 로고스론을 원용했고, 사도 바울조차 선교와 설교에서 이방시인과 철학자를 인용했다. 이런 게 바로 혼합주의가 아닐까?

 

5. 종교다원주의?

 

최일도 목사에 대한 의혹제기 글들은 위에 열거한 것과 같은 거슬리는 부분을 토로하다가 별안간 '종교다원주의'에 대한 혐의로 비약한다. 나아가, 최일도 목사 자신이 여기에 대한 질문에 별 답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침묵으로부터 또 뭔가를 추론하면서 종교다원주의냐 참 신앙이냐를 선택해야 할 시점을 운운한다.

 

하지만 말은 바로 하자. 결국 영성수련은 곧 혼합주의요 종교다원주의라는 자신들의 기존 선입주견이 튀어나온 것 아닌가?

 

이들이 최일도 목사에게 혼합주의에 덧붙여 종교다원주의의 혐의까지 씌우게 된 까닭은 결국 성경을 들고 들어가지 못하게 한다든지, 죄와 회개, 예수님과 성령님에 대한 종교적 상징과 언어를 언급하지 않는다는 식의 극히 표피적인 문제이다.

 

표피적으로 하나님, 예수님, 성경을 들먹이고 과시하는게 그토록 문제라면 교회 내에서 명시적으로 하나님, 예수님, 보혈과 같은 말을 들먹이지 않으면서 행해지고 있는 수많은 내적 치유 강좌와 심리학적 기법을 수용한 상담도 모조리 이단으로 '찍어내 버려야' 하지 않을까?(*1)(*2)

 

사실 이런 혐의제기방식은 꽤 낯이 익다. 예전에도 문익환 목사에 대해서 민주화운동을 하면서 보혈이니 십자가니 하는 말을 하지 않았다고 해서 목사도 아니라는 식의 이단시비가 있었다. 사실은 민주화운동을 비겁하게 외면하고 로마서13장 운운하면서 독재정권과 결탁한 그 사람들이 무언가에 눈이 멀어 있었던 사람들이 아닌가? 남들이 눈 멀어 있다고 힐난하지만 정작 자신들이 무언가에 눈이 멀어 있다보니 표피적인 문제제기를 하게 되는 것은 아닌지 스스로를 먼저 돌이켜 보는 게 좋을 듯 싶다.(*3)

 

끝으로 한 가지, 미주 크리스찬투데이는 홈페이지를 둘러 보면 상당한 보수성향을 대변하는 것으로 짐작된다. 미주 다일공동체 대표의 반론도 있었던 것 같은데 이 글은 눈에 띄지 않고 검색해도 나오지 않고 있다는 점은 최일도 목사에 대해 일정한 방향의 메시지를 표시함으로써 이단시비로 흠집을 내겠다는 속내가 풍겨 나오는 대목이어서 주목해 두지 않을 수 없다. 나아가, 최일도 목사 개인에 대한 시비를 넘어, 관상기도가 혼합주의, 종교다원주의라는 이유로 보수교단들에서 이단으로 단죄되도록 하기 위해 군불때우기 하시고들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의문도 당연히 품게 된다.

 

부디 그렇지 않으시기를 빈다. 그건 우리 한국교회는 답이 없는 근본주의자들의 집합체요 하고 세계교회 앞에 떠들고 다니는 '제얼굴에 침 뱉기'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특히 영적 분별력 운운하면서 성경과 종교에 대한 표피적인 선입견을 전가의 보도처럼 휘두르는 분들, 먼저 제 눈의 들보부터 보셨으면 좋겠는데 절대 안 들으실테니 참 답답하다. 들을 귀 있는 분은 제발 좀 들으시라.



[덧붙임]

(*1) 최일도 목사가 '맑은 물 붓기'라는 화두를 통해 마음 속 원망들을 털어버리는 훈련을 하도록 했으니 십자가의 보혈이 언급되지 않은 혼합주의이고 종교다원주의라는 식의 비난도 황당하긴 매한가지다. 이런 식의 꼬투리잡기라면 무엇을 건들 문제가 없겠는가? 형제에게 원망들을만한 일이 있을 때 예물을 놓아두고 형제와 먼저 화해한 다음 예배드리라는 주님의 말씀을 들은 당시 사람들을 생각해 보라. '주의 보혈로', 혹은 '예수의 이름으로' 화해했을까? 그런 교리의 정당화가 아니라 주의 말씀을 듣고 형제와 화해한 사람이 주의 뜻을 따른 사람이 아닌가? 원망과 분노를 털고 형제와 화해하는데 '주의 보혈과 십자가'를 들먹이지 않으면 혼합주의요 종교다원주의인가? '주의 보혈과 십자가'를 들먹이면서 갈등과 증오를 부추기는 행태야말로 오히려 비복음적, 비성경적인, 따라서 악마적인 것은 아닌지 생각해 봐야하지 않을까?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마태복음721)

(*2) 게다가 인터넷에 올라온 이 동영상을 보면 최일도 목사가 이 집회()에서 이단시비자들의 주장처럼 과연 예수님, 성령님을 언급하지 않았는지 그것부터 우선 짚어 보아야 할 것 같다.

(*3) 문제의 글을 올리신 사모는 '최일도 목사가 벗님들에게 보내는 편지'라는 글에 대해서도 노골적인 매도를 하셨다. 최일도 목사에 대한 그의 공개적인 매도의 요지는 율법과 은혜의 이분법은 기독교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런 글을 쓰고자 한다면 당연히 갖추어야 할 최소한 신학적 소양마저 없다는 것을 스스로 폭로하는 글이다. 율법과 은혜의 이분법은 마르틴 루터가 재발견한 바울신학의 핵심에 속하기 때문이다. 루터나 바울이 비기독교적이라고 참소하는 것과 다름없이 터무니없다.


Posted by 다일공동체

 

 

 

[중국다일공동체다일어린이집에 훈춘시 부시장님, 훈춘시 부련회 주석, 민정국 국장님깨서 방문해주셔서

격려해주시고 다일어린이집을 위하여 힘써주실것을 약속하셨습니다.

또한 멋진 대형 벽걸이 텔레비전도 선물해주셨습니다.

참 감사합니다.

다일공동체 www.dail.org

중다일블로그 blog.naver.com/chinadail

 

중국다일공동체 후원하기

국민은행 010-01-0619-487

(예금주 : 사회복지법인 다일복지재단)

문의 : 다일복지재단 02-2212-8004

중국 다일공동체

후원계좌 기업 017-033086-01-021

(예금주 : 사회복지법인 다일복지재단)

문의 : 중국 김학용원장 86-433-753-8004

 

 

 

Posted by 김학용

네가 어디 있느냐?(2)”

 

호렙산에서 떨기나무 불꽃 속에 현존한 하나님께서 모세야, 모세야라고 부르는 그 순간 모세는 내가 여기 있나이다(3:4)”라고 대답합니다. 모세가 흠과 티가 없어서, 하나님 앞에 당당해서 "내가 여기 있나이다" 라며 나아갈 수 있었을까요? 나를 부르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을 바라보며 , 제가 지금 여기 있나이다라고 응답하는 것이 진정한 나의 나됨을 찾는 길이건만 범죄한 인간은 창조주 하나님 앞에서 그만 자신을 감추어버리고 숨어버리고 맙니다.

 

어제 설곡산다일공동체에서 마친 143기 다일영성수련 기간동안에도 마음 깊은 곳의 상처와 분노, 숨겨둔 죄들을 꺼내지 못하고 초조한 얼굴과 그늘진 얼굴로 고뇌하는 분들을 보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만 내 마음을 고백하겠다고 말하며 내가 왜 인간들 앞에서 나의 부끄러운 모습을 내어보여야만 되느냐며 더욱 돌같이 굳어지는 얼굴들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참으로 놀라운 일은 성령님의 은혜로 덕지덕지 껴입은 거짓의 옷과 위선과 체면과 가식의 옷들을 이분들까지도 다 벗어 버리게 되었습니다.

 

부디, 하산하신 이후에도 속마음을 그때그때 다 꺼내어 드러내며 부끄러운 죄와 허물까지 고백할 수 있는 영적스승을 만나시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영적스승에게 조금씩 자신의 허물과 나약함, 부족함과 마음의 상태까지 말씀드리면서 자신을 열어나가야 영성생활에 진보가 있습니다.

 

그리고 용서를 구해야할 대상이 있다면 찾아가 용서를 구하시고 자신의 죄를 회개하시길 바랍니다. 마음속으로만 하나님께 잘못을 고하는 것으로는 충분한 회개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이렇게 보이는 고백이 있고 합당한 열매를 맺을 때에라야 비로소 삶에 놀라운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다일공동체 가족들이 혈연 이상으로 영성과 정신, 물질 등 모든 것을 과감하게 드러내고 나눌 수 있는 것은 가족들 보다 더 깊이 자기의 부끄러움과 허물과 한계와 감정적 약함과 영혼의 상태까지도 서로 서로 부끄러움 없이 고백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저와 아내와 우리 가족뿐만 아니라, 공동체에 헌신된 가족들은 부끄러움 없이 자신의 허물과 과오를 드러낼 줄 압니다.

 

그것은 예수 안에서 한몸이며 서로 신뢰하고 쌓아온 죄의 고백과 용서와 화해와 일치의 시간이 있기에 가능합니다. 그 어떤 부끄러움도 없이 서로의 나약함과 죄, 상처와 고통까지 다 꺼내놓을 수 있기에 예수 안에서 우리는 한 가족이라고 감히 말할 수 있습니다. 아하! www.dail.org

 

 

 

 

 

Posted by 다일공동체

“네가 어디 있느냐? (1)”

 

설곡산 다일공동체 예배실 입구에 들어서면 정면에 걸린 글씨가 제일 처음 눈에 들어오는데 “네가 어디 있느냐?”는 창세기 3장 9절의 말씀입니다. 한경직 목사님께서 써주신 글입니다.

 

나는 누구인가? 라는 질문이 자신이 스스로에게 직접 묻는 화두요, “나”라는 존재에 대한 질문이라면 “네가 어디에 있느냐? 는 나는 누구인가와 동일한 질문처럼 들리지만 공간과 시간을 넘어 계신 초월자와 유한한 인간과의 관계에 있어서 궁극적이며 너무도 꼭 필요한 필연적인 질문입니다.

 

범죄한 아담에게 하나님께서 던진 첫 번째 질문이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라는 질문이었던 것처럼 여러분이 마음문을 활짝 열고 하나님의 현존 앞에서 귀를 갖고 듣고자 한다면 여러분을 향해서 하나님은 여전히 오늘도 이렇게 물어 오실 것입니다. “네가 어디 있느냐?”

 

범죄한 아담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창4:10)” 하나님의 첫 질문과 아담의 이 대답은 과연 무엇을 의미할까요?

 

여러분이 혼자서 목욕을 할 때 누구도 보고 있지 않다면 내가 옷을 벗고 있는 것이 과연 부끄러울까요? 혼자서도 자기의 벗은 몸을 보고 부끄러움을 느낀다면 그것은 조금 문제가 있는 상태입니다.

 

그리고 또 있다면 서로 한 몸을 이룬 부부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회중 앞에서 거룩한 서약을 하고 온전히 하나된 부부는 서로 벗은 몸을 보고 보이더라고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습니다. 부끄러움을 느끼는 부부들도 있기야 하겠지만 그렇다면 그 부부가 아직 한 마음과 한 몸이 덜 되었다는 증거겠지요. 죄의 결과로 하나님과 분리된 것입니다.

 

하나님과 분리된 것이 죄의 결과입니다. “나”라는 존재가 생겨난 순간부터 “나”를 의식하는 순간부터 우리는 나의 생명, 나의 재산, 나의 가족, 나의 명예, 나의 그 무엇에 매여 하나님의 부르심을 듣지 못하고 애써 귀를 막고 살아갑니다. 하나님의 현존 앞에서 서보지도 그 음성 들어보지도 못하고 한 세상 그렇게 아무 깨달음 없이 낙엽처럼 가버리는 인생들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친구 여러분, 부끄러움이라는 감정에 대해서 잘 묵상해보시길 권합니다. 아직 무언가 부끄러워하고 무언가 숨기는 것이 있다면 그 숨겨둔 부분들이 하나님과 하나 됨을 막고 있는 가장 큰 장벽이 됩니다. 여러분이 지금 서 계신 그곳이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고백과 사죄의 은총을 누리는 자리입니까? 아니면 여전히 하나님께 등을 돌린 부끄러움의 자리입니까?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의 태도는 두 가지뿐입니다. 꼭꼭 숨어버리든지 제가 여기 있나이다 하던지 입니다. 아하! www.dail.org

 

 

Posted by 다일공동체

슌다르 쩌아쩌! 떠바잉, 허루!”

 

주일 예배를 마친 오후 3시 목양실에 앉아 있으니 네팔 형제들의 서툰 한국말소리가 들립니다. “나는 안산에서 왔습니다.” “나는 청바지 만드는 일을 합니다.” “나는 서울다일교회 가족입니다.”

 

네팔에서 온 나그네들을 위해 자원봉사하고 싶은 한 현역 장교의 마음이 한국어 교육으로 시작되었습니다. 한국어 선생님을 기쁘게 자원하신 육군소령, 남보람 집사님의 쉽고 재미있는 한국어 강의는 네팔형제들에게 너무 큰 감동과 유익을 주고 있습니다. 덕분에 주일날 서울다일교회의 오후시간이 매우 활기차고 풍요로워졌습니다.

 

교재부터 시청각자료까지 직접 준비해온 남소령님의 열정에 감사를 드립니다. 한 순간도 놓치지 않기 위해 집중하는 네팔형제들의 배움에 대한 순수한 갈망이 그대로 전달이 되고 공감이 됩니다.

 

비록 지금은 거의 모두가 생산직에 근무를 하기에 이렇게 주일날 예배드린 후에야 한국어 공부를 하고 있지만 더욱 근무여건이 좋아져서 평일 날에도 한국어 공부뿐만 아니라 성경공부도, 여가활동도 하는 시간들이 주어지길 빕니다. 이 소중한 한 시간 한 시간이 모이고 쌓이는 것만큼 네팔형제들의 꿈과 희망도 한 걸음씩 한 걸음씩 목표에 도달할 것입니다.

 

네팔 다일공동체 간사님으로 네팔 다일공동체를 위해서 최선을 다해 섬겨온 이진선 간사님이 지난주일 김효은 간사님에 이어서 오늘 건강한 몸과 맘으로 귀국해서 귀국인사와 보고를 성도들에게 해 주었습니다.

 

얼마나 고맙고 감사한지 모르겠습니다. 한주 한주 날이 갈수록 서울다일교회안의 네팔교구의 예배와 모임과 활동이 새로워지고 뜨거워지고 아름다운 전도와 친교가 넘치는 것 같습니다. 오늘 처음 교회에 나온 네팔 친구디네스 림부의 맑고 밝은 얼굴처럼 이들의 미래가 너무도 밝고 환합니다.

 

서울다일쩌아쩌, 슌다르 쩌아쩌! 떠바잉, 허루!”

서울다일교회, 아름다운 교회입니다! 바로, 당신입니다!”

아하!! www.dail.org

 

 

Posted by 다일공동체

“주님과 소통할 수 있는 방법은 기도뿐입니다.”


 

우리는 하루에도 셀 수 없을 정도의 수없이 많은 말들을 합니다. 의미없는 말들을 주고받기도하고, 때로는 변명하기 위해서, 때로는 이해시키기 위해서

하기도 하지만 결국 나를 표현하고 상대방과 의사소통을 하기 위해서이죠.
 
우리는 우리의 의사를 전달하기 위해 많은 노력들을 합니다. 말로, 글로, 표정으로, 바디랭귀지를 사용하기도 하고 언어장애가 있는 분과는 수화로 전달하기도 합니다. 상대방과의 소통을 위해서 이렇게 많은 노력을 하고 사는 우리가 하나님과의 소통을 위해선 과연, 어떤 노력을 있을까요?
 
내게 주어진 삶이 너무 고달프고 지치고 힘들다고 우리 주님은 이런 나를 도와주기는 주시기는 커녕 항상 침묵하고만 계시다고 자신도 모르는 사이 불평과 탄식이 새어나오시지는 않나요? 앞날이 안개낀 듯 뿌옇고 희미하기만 하다고 주님과의 유일한 소통창구인 기도까지 쉬고 있지는 않은가요?
주님과 내가 소통할 수 있는 방법은 유일무이한 기도뿐입니다. 언제나 어디서나 가능합니다 당신이 지금 어디에 있든지, 무엇을 하고 계시던지, 하나님을 부르시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실 수 있습니다.

 

혹시 한마디 기도조차 하지 못할 정도로 마음이 닫혀있습니까? 어떻게 무슨 말로 기도를 드려야 할지 그저 막막하신가요? 그런 친구 여러분들을 위해서 CTS TV 스튜디오에서 생방송으로 밤11시부터 자정까지 두손 모아 기도합니다.

 

'하나님을 부르세요, 콜링갓' 에서 우는 자들과 함께 우는 마음으로 기도의 용사들과 함께 뜨겁고 간절하게 중보기도 하겠습니다.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기도와 간구로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는 이 시간 주님의 은혜와 사랑이 여러분의 마음속에 깊이 자리 잡기를 소망하며 생방송 콜링갓을 시작하러 갑니다.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아하!! = (아멘+할렐루야)

 

 

Posted by 다일공동체

“새봄을 맞이한 새내기들에게!”

 

 

서강대학교 캠퍼스에서 K-TV 멘토링 토크를 방송했습니다. “청춘이여, 인생설계도를 준비하고 있는가?”란 주제였는데 특별히 오늘 총장으로 취임하시는 유기풍 총장님의 인사말씀의 격려메세지가 공식적인 첫번째 행사여서 뜻 깊었고 그리고 존경하는 우리시대 멘토들과 함께 두시간 넘게 마음을 활짝 열고 이야길 나누어서 참으로 보람이 있었습니다.

 

오늘 방송에 참여한 성직자들이 모두 직접이든 간접이든 대학에 몸을 담고 대학생들을 늘 밀접하게 만나는 사람들이기에 오늘을 살아가는 대학생들의 마음을 그런대로 잘 읽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하나같이 우리 대학들이 온통 취업준비로 너무 정신없이 돌아가는 것 아니냐며 안타까워했습니다. IMF 위기상황이 저에게는 아직도 엊그제 일어난 일처럼 여겨지는데 대학생들에게는 특히 금년 봄에 입학한 새내기들에겐 마치 다른 나라에서 일어난 일로 여기고 있다는 이야기가 제 마음에 걸렸습니다.

 

사실 IMF 구제금융사태 이후부터 길에 내몰리고 절박했던 사람들이 너무도 많았던지라 일터의 중요성이 증대되고, 노동의 유연성 정책으로 인해 임금이 반에 불과한 비정규직이 양산되면서 그때부터 ‘묻지마 취업전쟁’을 치루고 있는 것이 바로 오늘의 현실입니다.

 

그 이후로 고교시절에는 소위 명문대학에 진학하기 위해서 진액을 빼고, 더러는 자신의 소질과 개성에 맞지 않는 전공을 선택하고, 대학시절에는 입학하자마자 영어공부에 스펙 쌓기와 공무원 시험 등에 매달리다 보니까 ‘되는대로 취업’이 유행하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무한경쟁과 업적 위주의 자본주의 사회라는 객관적 환경이 무엇보다 근본적인 원인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에 부화뇌동하지 않고 스스로 떨쳐 일어나 삶과 새시대의 진정한 주인공으로써 대학생답게 푸르고 푸른 청춘답게 당당하게 떳떳하게 하나님앞에서 역사앞에서 부끄럽지 않은 진정한 꿈과 희망을 지닌채 새학기를 시작할 수 있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특히 새봄을 맞이한 새내기들에게는 자신의 내면을 탐구하고 어떤 일이 온 마음으로 기쁘게 투신할 수 있는 일인지를 계속 물으며 내적갈망을 모색하며 독서와 대화, 사회적 참여와 스승 및 선배와의 전인격적인 만남이 참으로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말만 들어도 가슴이 뛰며 뛰지않던 가슴까지도 다시 뛰게하는 청춘이란 이름에 어울리는 젊음답게 탐색과정과 기도가 먼저 앞서는 인생설계야말로 대학생활에서 특히 새내기들에게 제일 중요한 과업이라 생각합니다.

 

이렇게 저렇게 좀 해보다가 실수 좀 하면 어떻습니까? 실수는 막내의 특권입니다! 제발 실수하더라도 좋으니 새내기 여러분, 일단 저질러 봅시다! 지금부터, 여기부터, 나부터! 아하!!

 

 

Posted by 다일공동체

“무슨 일을 하든지 그 사랑으로...”

 

 

네팔, 필리핀, 캄보디아에서 귀한 사명 잘 감당하고 돌아온 다일의 간사님들이 너무도 자랑스럽습니다.

 

김효은, 변규리, 추고은간사님이 햇살 따뜻한 봄날에 화사한 얼굴로 서울다일교회로 돌아와 인사를 하는데 꽃보다도 더 아름답기만 합니다.

 

한사람 한사람 심령과 얼굴에서 넘쳐 나오는 기쁨과 감격이 어찌나 맑고 밝은지 현지에서의 은혜와 감동의 삶이 그대로 전달되는 것 같습니다.

 

서울다일교회에서 매주예배 드리는 네팔형제들을 위해서 현지언어 네팔리어로 유창하게 인사를 하니까 처음만난 사이지만 오랜친구를 만난 것처럼 반갑게 얼싸안고 즐거워하더군요.

 

네팔다일공동체 현지의 소식을 들려 줄때는 모두가 집중해서 바라보며 귀기울이는 모습에서 고국을 그리워하는 네팔형제들의 마음이 아주 뭉클하게 전해져 왔습니다.

 

불과 1년을 지냈는데 모든 간사님들이 현지언어를 모국어 쓰듯 편안하게 구사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놀라운지 모르겠습니다. 우리 간사님들이 머리가 유난히 좋아서라기보다는^^ 현지인에 대한 사랑과 열정이 얼마나 크고 간절했으면 이렇게 놀랍게 소통이 자유롭게 이루어진 것일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새삼 파송받아 각자의 사명실현지에서 섬김과 나눔의 삶을 실천하는 다일의 간사님들이 너무 대견하고 기특하기만 합니다.

 

돌아온 간사님들이 하는 얘기는 누구도 다를것이 없더군요. 눈물을 보이며 하는 이야기가 동일합니다. 우리들을 만나는 기쁨도 크지만 현지를 떠나오는 아쉬움이 갑절로 크다는 것입니다. 아이들과 주민들과 헤어져 고국으로 올 수 밖에 없는 헤어짐이 너무도 눈물나고 안타깝다는 것입니다. 기회가 되면 꼭 다시 가고 싶다는 간절한 희망을 이야기합니다.

 

실제로 일년 계약기간을 마치고 돌아온 추고은간사님은 일년 계약기간이 만료되기 전부터 다시 돌아가서 다일의 빈민선교를 위해 몸도 마음도 다 바치고 싶다고 간청하여 곧바로 내일 아침 비행기로 다시 돌아갑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그 사랑으로, 무슨 일을 만나든지 성령의 은혜로 귀한 열매 맺으리라!” 아하!!

 

 

 

Posted by 다일공동체

“말라리아 감염을 감기쯤으로...”

 

 

탄자니아 다일공동체 원장 변창재 선교사님이 말라리아로 너무 고생을 심하게하고 있고 부인되는 이현신 선교사님도 복통과 설사로 힘들어 한다는 소식을 전해 들으니 눈물이 핑돌고 맘 한켠에서는 이들을 위해 더욱 간절히 매달려 기도하지 못한 것 같아서 못내 미안함이 자리를 잡습니다.

 

빈민촌 아동들에게 꿈과 희망을 주고싶어서 일대일 결연을 위해 일일이 가정방문을 다니는 중이라는데 다니면서 쌓인 피로에 지난 주 배식이 몸에 무리가 있었나 봅니다. 그럼에도 기근과 질병으로 고통당하는 아프리카 아이들을 너무 사랑해서 말라리아로 고생하면서도 늘 기뻐하며 행복하다고 말하는 선교사님 부부가 참으로 자랑스럽고 고맙기만 합니다.

 

한달전 말라리아 의심증세로 아프리카에서 돌아오자마자 공항에서 응급실로 곧바로 실려가서 두주간 고생하고 나온 기억이 생생하여 “얼마나 힘들어 그래!”하며 위로 전화를 했더니만 진짜 말라리아로 고생하는 이 친구가 도리어 저를 위로하더군요. “목사님, 괜찮습니다. 여기 선교사들은 늘 감기처럼 달고 사는 거예요. 좀 쉬어가라는 뜻으로 알고 쉬엄쉬엄하고 있으니까요 염려마시고 기도해주세요...”

 

고열과 설사가 반복이 되며 두통과 근육통에 온 몸이 쑤시고 결리며 혀가 바짝바짝 말라가는 그 고통이라니 말라리아도 아닌 말라리아 의심 증세만으로도 처절하게 힘들었었습니다. 그런데 말라리아 감염을 감기쯤으로 여기면서 복음과 빵을 전하기위해 항상 고군분투하시는 변선교사님과 아프리카의 모든 선교사님들! 부디, 힘내시라고 힘찬 응원의 북소리를 뜻모아 마음모아 보내드립니다. 둥둥둥~~~ 둥둥둥~~~ 둥둥~~

 

변창재•이현신 두 선교사 부부는 물론이고 이분들뿐만 아니라, 아프리카와 아시아 오지에서 주의 일에 목숨걸고 열심히 매달리시는 착한 선교사님들을 위해서 친구 여러분들도 뜨겁게 중보기도해 주실거죠? 아하!

www.dail.org

 

 

Posted by 다일공동체

“청춘이여, 인생설계도를 준비하고 있는가?”

 

 

예전에는 대학 캠퍼스에서 학생들이 낭만을 말하고 사회정의를 논하기도 하면서 청소년에서 성인으로 넘어가는 성장기 과정의 진통을 함께 앓으면서 정체성을 찾아가는 시기였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오늘을 살아가는 학생들에게 있어서 대학은 조금 다른 의미로 인식되고 있는 느낌입니다.

 

얼마 전 조사에 따르면 청년층의 77%가 자신의 전공과는 무관한 업무 분야에서 첫 직장생활을 시작한다는 결과가 발표됐습니다. 이는 낮은 취업률과 취업의 어려움 때문이기도 있지만, 전공을 선택할 때부터 자신의 적성과는 무관한 학과에 진학하는 것부터 문제가 아닐까 생각 하게 됩니다.

 

주위에서 만나거나, 매스컴 등을 통해서 본 우리 대학생들의 현주소는 과연 어떻다고 보시는지요? 현대 우리 대학생들은 학창시절을 어떻게 보내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최근 취업 포털 인쿠르트에서 대학생들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한 결과 74.9%의 대학생이 스스로를 ‘나홀로 족’이라고 생각한다는 너무도 놀라운 통계조사가 나왔으며 여기저기서 현재 우리 대학생들이 푸른 청춘이 아니라, 빛바랜 청춘이 되어가고 있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높습니다.

 

입시전쟁이 끝났다는 안도감을 느낄 새도 없이 등록금과 학점 걱정에 영어와 외국어등 다양한 스팩쌓기와 취업 준비와 온갖 스트레스 속에서 청춘의 꿈을 고스란히 잃고 살아가는 학생들이 너무 많다는 것입니다. 현재 우리 청춘들은 문제점이 무엇이고 그 원인이 무엇이며 해결책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대학 1학년의 신입생 생활이 한 개인의 미래를 좌우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우리 대학생들이 자신의 인생설계도를 그리기 위해서 대학 초년생 때 준비해야만 할 것들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신학기를 맞은 대학 1학년 새내기들과 우리 대학생들이 인생의 봄날에 꼭 준비해야 할 것들이 있다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우리 대학생들이 잃어버린 꿈을, 그 청춘의 소중한 꿈을 어떻게 하면 다시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친구 여러분들에게 ‘청춘’의 의미는 무엇이며, 우리가 청춘의 시기에 결코 놓쳐서는 안 되는 삶의 가치나 인생 설계에 대한 조언을 부탁드립니다. 아하! www.dail.org

 

Posted by 다일공동체


티스토리 툴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