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12.18
~~아하목사의 행복편지~~

“내 인생의 책,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3)”

도스토옙스키가 이해하고 받아들였던 진리와 사랑은 육화된 하나님, 곧 그리스도 예수입니다. 많은 지성인들과 문학인들이 이 복음적인 메시지를 덮어두거나 다루지 않고 살짝 지나가면서 서평하는것도 많이 보았는데요, 예수그리스도를 배제하고는 이 작품은 어떻게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

냉철한 무신론자 이반은 대심문관의 비유를 통해서 그리스도를 냉소하며 멸시합니다. 여기서 도스토옙스키는 개인의 영혼구원 이야기를 하다가 거시적 관점에서 인류구원 이야기를 전하려고 합니다. 대심문관이 기적으로부터 믿음이 나오는가? 묻는데 그는 기적에서 믿음이 나오는 건 아니라고 분명히 말합니다.

믿음 때문에 기적이 일어날 수는 있다고 말합니다만 여기서 그는 사회적, 신학적 의미를 지닌 인류구원을 말하는 것으로 그치는가? 결코 아닙니다.

이 소설의 백미라고 할 수 있는 이반의 작품인 극시 ‘대심문관’은 수도자 알료사와 대좌한 무신론자 이반이 그 극시를 낭독하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15세기, 이단 심문이 무섭게 판을 치던 시대의 스페인 세빌리아시가 그 무대입니다. 이단자들을 화형으로 처형한 광장에 그리스도가 나타나지요.

사람들은 곧 그가 그리스도임을 깨닫지만 대심문관의 명령으로 그리스도는 체포되고 투옥됩니다. 그리고 그날밤, 감옥 안에서 대심문관이 그리스도와 대결하는 장면이 아주 오금을 저리게 만듭니다.

그리스도는 광야에서 악마로부터 빵과 기적과 권력의 세 가지 유혹을 받는데, “사람은 빵만으로 살진 못한다!” “ 주,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며 유혹을 단호히 물리칩니다.

만일 그때, 돌을 빵으로 바꾸었더라면, 마귀에게 절했더라면,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렸더라면, 만민을 다 쉽게 얻고 마귀의 말대로 천하만국을 손에 잡았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인간의 참 자유를 박탈하지 않기 위하여 오직 하나님만을 섬기며 하나님 뜻에 순종하기 위해 유혹을 물리치셨지만, 인간은 진정한 자유와 같은 무거운 짐을 지고 갈 깜냥이 되질 못한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항상 빵과 쾌락을 주는 상대를 찾아 헤메고, 그 앞에 엎드리기를 바라고 있다고, 대심문관은 그리스도를 비 웃으면서 탄핵합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대심문관 말하길 “우리는 그들에게 자유라는 무거운 짐으로부터 풀어주고, 빵을 주었다. 바야흐로 사람들은 당신이 원하는 자유가 아닌 자신이 원한 자유의 몸이 되었고 기적과 신비와 권위라는 이 세 가지의 힘 위에다 지상 왕국을 구축하였다!”

대심문관의 심문과 규탄에 대하여 예수 그리스도는 한 마디 대꾸도 하질 않습니다. 시종 침묵을 지키고 있다가 그리고 마지막에 무언 속에서 대심문관에게 다가가서 따뜻하게 입맞춤을 해줍니다. 이것이 도대체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요? 대심문관이 민중을 대신하여 자기가 걸머진 짐에 대해 키스를 해주신 것일까요?

어쩌면, 그리스도는 자기를 규탄하는 대심문관이 마음 깊숙히는 그리스도의 옳음을 믿고 있으면서도, 현세에 있어서 조급히 물직적 행복을 민중에게 보증하기 위하여서는, 어디까지나 자기의 지배 이론을 관철하는 수밖에 없다고 자각하고 있음을 간파했기 때문일까요? 과연 그럴까요? 여러분 생각은 어떻습니까?

무신론자이면서도 지성을 갖추고 있는 허무주의자인 이반, 주 예수님을 사랑하고 그리스도를 닮아가길 원하는 수도자 알료사, 이 두 사람을 통해 작가를 지배해온 신학과 사상과 인생의 고뇌를 여기에 다 집약시켜 놓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탐욕스런 아버지와 거기에 항거하는 장남 드미트리 사이의 심리묘사 과정과 수도자와 무신론자 이 두사람의 첨예한 고뇌와 갈등과 대립 등이 이 작품의 거대한 줄거리를 형성하고 있습니다만 이 긴긴 내용은 전부다 제 1부로 기획되었던 작품입니다. 제 1부만을 완성한 후 도스토옙스키는 갑작스러운 죽음을 맞아 제 2부는 완성되질 못하였습니다.

도스토옙스키는 인간이 자유에 대한 의지와 갈망과 힘 때문에 인생에서 많은 고통을 겪는 것이 사실이지만 자유가 없다면 인간은 인간다울 수 없다고 말합니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은 인간의 부조리와 자유의지를, 신의 존재 유무를 철저하게 파헤친 작품입니다. 인간의 여러 유형과 그들이 처해있는 모순된 상황들이 공감과 반감을 함께 자아내면서 말입니다.

그리고 그는 지적합니다. 당시 교회의 부패와 성직자들의 문란한 생활도 매우 신랄하게 비판했습니다. 저 먼데 있는 사람을 구원한다며 인류구원과 사랑을 말하느냐? 네 집 네 문 앞에 있는 집 없는 사람, 헐벗고 굶주린 사람에게 먼저 사랑을 실천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들도 인정 할 거예요. 저 멀리 있는 사람은 사랑하기 쉬워요! 정말 사랑하기 힘든 사람은 지금 내 곁에 내 가까이에 있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까? 안 그렇습니까?

그가 마지막으로 한 말이 매우 의미심장합니다.
“만약, 누군가 그리스도가 진리가 아니라고 우긴다 하여도 그래도 나는 그리스도와 같이 있기를 선택할 것이다!” 였습니다. “아아, 성경이 얼마나 위대한 책이며 이 얼마나 위대한 교훈입니까?” 영원한 베스트셀러인 성경에 대하여 그가 한 고백입니다.

이 작품 첫머리에 등장한 한 알의 밀알이야기를 잊지마세요 그는 이 말씀을 통해서 인류구원과 인류 평화라는 많은 구원의 대상에서부터 한 영혼, 한 사람으로, 한 알의 밀알로 초점을 바꾸라고 줄기차게 이야기하고 있다는 사실 말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지극히 작은 자 한 사람에게 진정 관심을 갖고 살라는 것입니다. 기적과 부귀와 권위를 상징하는 맘모스 성전인 대형교회보다, 중세시절 그 하늘을 찌를듯한 위용을 자랑하는 대성당 건물을 자꾸 세우는 것보다도 이 추운겨울에 지금 당신 집 앞에서 떨고 있는 굶주린 한 영혼에게, 헐벗은 한 사람에게 사랑을 실천하라고 말입니다. 철학과 관념과 추상에서 벗어나 내 옆에 있는 한 사람, 한 영혼부터 입니다.

“만약 ,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 해도 인간은 인간을 위해 신을 창조할 필요가 있다” 라고 주장하며 섬뜩한 말을 함부로 해대는 사람들도 꽤 많이 만났습니다, 그런데요 무신론을 이야기하고 “신은 죽었다!” 말한 니체까지도 도스토옙스키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읽고는 극찬한 사실을 아십니까?

이 작품의 작가 도스토엡스키는 인류를 구원한다는 큰 목소리와 함성과 구호보다도 내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할 수 있어야 한다고 속삭이며 말합니다. 인류구원이라는 거대담론을 말하기 전에 먼저 참 사랑의 나눔을 실천해야 할 것을 분명히 전달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기독교인이든지 아니든지, 종교가 있든지 종교가 없던지, 이 책을 읽다가 제발 중간에 포기하진 마세요. 포기란 배추를 셀 때 쓰는 말이라니까요^^ 포기는 한포기, 두포기, 세포기, 배추 셀때만 쓰시구요, 첫 장부터 마지막 페이지까지 한번 정독하시길 다시한번 권합니다.

일독만 하여도 코에서 흐르는 코피를 잊을 정도가 아닙니다. 피 한바가지를 헌혈하고 싶은 마음도 들것입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참 사랑의 실천은 지금부터, 여기부터, 작은 것부터, 할 수 있는 것부터, 나부터입니다. 감사합니다!

 

 

 

 

 

 

Posted by 다일공동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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