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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0.05.12 자기소개서-신앙고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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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을 믿지 않았던 20대 중반에 시작한 사업은 실패라는 쓰디쓴 교훈과 가르침은 물론 실망과 패배감 또한 가져다 주었습니다. 노숙생활과 길에서 음식을 주어먹는 거지 같은 생활도 해 보았습니다. 사기죄로 3개월간 의정부 교도소에 수감된 후 1년에 1년 6월의 집행유예 선고를 받기도 했습니다. 저는 신용불량자에 전과자, 실패자, 아무짝에 쓸모 없는 인간이었습니다. 악마에게 제 영혼을 팔아서라도 다시 서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그마저도 쉽지 않았습니다. 그 후 몇 번의 자살 시도로 생을 끝내려는 어리석은 생각도 했습니다.

어느 날 문득 “만약 신이 있다면, 신께서 나를 만들었다면 왜, 무엇 때문에, 어떤 목적으로 나를 만들었을까?” 하는 의구심이 들었습니다. 신이 그냥 실수로 혹은, 심심해서 나를 만들지는 않을 테니까 말입니다. 이때부터 “나는 누구인가?, 어디에서 왔으며, 무엇을 위해 태어났는가?” 하는 질문을 끊임없이 반복해 보았습니다. 하지만 그 답을 책 속에서만 찾으려 했으며 신의 존재도 하나님은 아니었습니다. 몇 년의 시간이 쏜살같이 흘러갔지만 해답의 진전은 없었습니다. 삶의 진전도 없어 생활은 낳아지기는커녕 더욱 더 악화되었고 제 마음은 이미 사람의 그것이 아니었습니다.

몇 년이 흐른 후 저는 투자제안서를 들고 투자자를 찾아 다니고 있었습니다. 그 모습을 보신 어느 아주머니(집사님)께서 “우리 목사님께 한번 보여보세요. 목사님이라 돈은 없지만 인맥이 넓으시니 혹시 알아요?” 하시며 저를 교회로 인도했습니다. 믿음은 없었으나 목사님과 얼굴 도장이라도 찍을겸 저녁 예배에 참석 했는데 예배 중에 내가 누구이며, 어디에서 왔는지에 대한 답을 얻을 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 뒤로 3년간 교회 창고에서 먹고 자며 주보제작이나 목사님 문서수발, 부설 유치원 운전 및 차량봉사, 성가대 등의 봉사를 하며 “하나님 나를 쓰세요”라는 기도만을 드리며 하나님께서 저를 사용할 때를 기다렸습니다.

어느 날 교회의 성도 한 분과 속 깊은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는데 그 분은 신용불량자라며 자신이 채권자들로 인해 겪고 계신 고통과 아픔을 들려 주셨습니다. 그 이야기를 듣고 위로도 하고 먼저 격은 저의 경험적 노하우도 들려 드렸습니다. 압류에 대한 불안함으로 불면증에 시달리며 가족과도 관계가 악화된 상태 였기에 제 조언이 큰 위로와 힘이 된다고 하셨습니다. 그렇게 시작된 일이 계기가 되어 인터넷에 신용불량자들의 모임을 만들어 온라인에서도 같은 활동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문득 하나님께서 저로 하여금 채무자를 돕는 일을 주시고자 실패를 경험하게 했다는 믿음이 들었습니다. 이때부터 심리상담사를 공부하며 상담자로써 준비했고, NGO대학원에서 공부하며 NGO지도자로 쓰일 준비도 했습니다.

1999년 시작된 시용불량자들의 모임은 2003년 신용사회구현시민연대라는 이름으로 당시 재정경제부에 비영리민간단체로 등록하였습니다. 2000년부터 본격적인 활동에 들어가 신용카드 길거리모집을 금지 시켰고 IMF의 권고에 의해 사라진 이제제한법의 재 입법청원과 채무자 상담기구의 설립을 요구하여 신용회복위원회가 설립되었고 대부업법의 제정, 파산 및 개인회생법의 제정, 연대보증제도의 폐지 등의 결실을 맺어 갔습니다. 이때부터 교회 창고에서 나와 방을 얻어 생활하였으나 이 방도 잠자리가 없는 채무자들에게 개방하여 공동생활을 하는 ‘약속의 집’으로 운영하였는데 이는 자연스럽게 전도로 이어지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제게 사명만 주시고 함께할 동역자도, 배우자도 허락하지는 않으셨습니다. 평범한 가정을 이루고자 했지만 돈이 아닌 가치에 목적을 둔 저를 이해해줄 자매는 교회 안에도 없는 것 같았습니다. 아니 오히려 가난한 형제와 결혼한 자매는 “자신의 믿음과 기도가 적어 저런 형편없는 형제와 결혼했다”는 오명을 피하기 위해 돈 많은 배우자를 놓고 기도하는 듯 보였습니다. 이웃의 가난과 아픔은 외면하고 성전건축을 위해 기도하는 교회, 그 물질을 충당하기 위해 그리고 자신의 부를 위해 기도하는 성도들…, 하나님은 있으나 교회엔 하나님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는 이때부터 하나님께 삐쳐서 교회를 등지기 시작했던 것 같습니다. 신앙을 가지면서 끊었던 술과 담배도 이때쯤부터 다시 시작하게 된 것 같습니다. 그리고 시민단체를 운영하며 홈페이지를 제작하는 새로운 영리사업을 시작했습니다. 수입이 조금 생겨 어느 정도 삶이 안정되면서 불신자였으며 현재는 이혼한 부인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장모님께서 서두르시는 통에 식은 차차 올리기로 하고, 혼인신고 후 살림을 합쳐 신혼살림을 시작 하였습니다.

하지만 3년여의 신혼생활도 2008년 여름부터 어려워진 사업으로 불화가 잦아 지면서 부부 모두결혼을 후회하며 서로를 원망하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급기야 아내는 강력하게 이혼을 요구해 왔습니다. 저는 이혼만은 막아보려 시민단체를 후배에게 떠넘기고 사업을 정리한 후 스토리라운지 마케팅 담당 이사로 취업하여 돈을 벌어 가정을 안정 시키고자 했습니다. 하지만 스토리라운지는 경영난으로 급여를 제때에 주지 못하게 되었고 아내는 이를 기다려 주지 않았습니다. 아내의 계속되는 성화에 저도 이혼이 서로에게 더 낳은 결정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고 2009년 3월 법원으로부터 합의이혼 승인을 받았습니다. 이혼 후 아내는 제주도에 사는 언니와 함께 일하겠다며 이사를 했고, 빈손에 옷 보따리만 가지고 나왔던 저는 2009년 8월 회사의 부도와 함께 직장을 잃었습니다.

그 후 여러 가지 일들을 도모 하였으나 뜻대로 되는 일이 없었습니다. 마치 20대 중반, 사업 실패로 좌절하던 그때의 그 모습으로 돌아와 있는듯 했습니다. 돈 없다고 나를 버린 아내를 원망하며 술로 한동안을 살았습니다. “돈 있으면 남편이고 돈 없으면 남이냐?”하며 전처를 원망하고 정죄 했습니다. 원망과 한숨, 한탄, 그렇게 하루하루 견디듯 살다가 문득 다시 살아야겠다고 생각 했습니다. “내가 살아온 40여년 세월만큼을 앞으로도 살텐데 남은 생을 어떻게 할까?” 하는 생각이 들면서 나를 찾는 여정이 시작되었습니다. 아내는 아니지만 제겐 가족이 필요했으며 시골생활을 하고 싶었기에 시골 공동체를 찾아 보았습니다. 풀무원, 강화도 농민회를 거치며 결국 경기도 화성의 행복회 야마기시즘을 찾게 되었습니다. 그 곳에서 특강 연찬회를 통해 화, 무소유, 자유 등의 테마를 다루며 새로운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새로운 깨달음이 새로운 삶으로 저를 인도해 줄 것이라 믿으며 야마기시즘 일원으로 이곳에 남기를 청하였습니다. 하지만 1년도 채 지나지 않은 내부 분열의 후유증 때문인지 외부인이 들어오는 것을 심히 경계하는듯 보였습니다. 그들은 제 문제를 놓고 논의를 거듭하더니 결국 시간을 갖고 천천히 생각해 보자며 일단은 2개월간 함께 하고 그 후엔 집으로 돌아가 야마기시즘 모임을 통해 준비해 나가자고 했습니다. 저는 그 분들의 결정을 따르기로 하고 기독교에서도 야마기시즘과 비슷한 활동이나 노력이 있는지 알아 보았으나 천주교 활동이 많은 듯 보였습니다. 하지만 결국 개신교공동체중 하나인 다일공동체를 찾았습니다.

밥퍼 최일도 목사님은 언론을 통해 보고 들어왔던 분이었기에 주저 없이 영성수련을 받게 되었습니다. 영성수련과 함께 그 동안 하나님께 가져왔던 오해가 풀리고 아내에 대한 원망이 사라졌으며, 돈만 밝히고 이웃의 아픔에 눈감아 왔던 교회에 대해서도 새로운 이해가 생겼습니다. 정말 세상이 달라 보였고, 기가 뿜어져 기쁨이 충만하게 되었습니다. 다시 하나님께 돌아와 세로운 삶을 살고자 하는 희망이 생겼고, 술과 같은 외부의 자극을 통해 실망, 절망, 사망에 이르는 삶을 청산하고, 더 나아가 이웃을 섬기며 믿음 안에서 살고자 하는 목표가 생겼습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는 말씀대로 저의 삶은 완전히 새로워 졌습니다. 삶의 의미와 목적을 찾았다는 것만으로 너무 행복합니다.

아세찾기 이후 야마기시즘에서 함께하기로 했던 시간을 채우는 일은 마치 어린아이가 소풍날을 손꼽아 기다리듯 그렇게 가슴 설레며 기다려야 했습니다. 모세원장님과 주고받은 메일, 전화통화는 제게 희망을 주었습니다. 다일공동체로 들어오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었지만 모세원장님께서 다일로 들어오는 것을 논의하기 위해 보자고 했을 땐 어떻게든 시간을 내야만 했습니다. 야마기시즘은 1주일에 1일은 함양이라는 자기시간을 가질 권리가 있었기에 수련원을 다시 찾을 수 있었습니다. 버스에서 내려 1.5Km를 걸어가여 주위를 들러 보았습니다. 졸졸 흐르는 시냇물, 손을 흔드는 나무들, 노래 부르는 새들…, 모두 나를 반겨 주는듯 했습니다.

야마기시즘에 돌아와 사람들에게 다일공동체 이야기를 많이 했는데, 처음엔 함께하기를 꺼려했던 야마기시즘 사람들이 이젠 저와 함께하기를 원합니다. 제가 다일공동체로 가는 것 보다 야마기시즘에 남기를 바랍니다. 아마도 아세찾기 이후 달라진 제 모습이 남아도 좋을 사람처럼 보였나 봅니다. 제가 서울로 돌아온 첫날부터 3일간 매일 저녁 사람이 바뀌어가며 야마기시즘 사람들에게 전화가 옵니다. 이젠 함께하고 싶다는 이야기를 솔직하게 하며 언제든지 야마기시즘에 들어오라고 합니다. 하지만 이제 제겐 가야 할 길이 결정되었으며 살아야 할 목표가 세워졌기에 쟁기를 맨 농부처럼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고 앞으로 나아가려 합니다.

저는 이제 진정으로 모든 만물을 창조하시고 다스리시는 유일하신 분 하나님 아버지를 믿게 되었습니다. 저를 위해 대신 죄 값을 감당해 주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며, 그 분이 제 삶의 주인임을 고백합니다. 지금도 저와 동행하시고, 죄를 깨닫게 하시고, 순간순간 인도해 주시는 성령님을 믿습니다. 앞으로 남은 삶 동안 제가 무엇을 해야 할지 아직 구체적으로는 모르지만 어떻게 살아야 할지에 대해서는 분명한 답을 갖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사람이 되도록 기도하며 노력할 것입니다. 이젠 무엇을 하든지 어디에 있든지 제가 만난 사랑의 하나님을 몸으로, 행함으로 전하는 삶을 살도록 노력할 것입니다. 제 삶의 가장 근본적인 필요를 채워주신 하나님께 감사 드립니다.


2010년 3월 11일 석승억

Posted by 비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