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일공동체]

다일공동체 영성수련회(다일영성수련)

"아름다운 세상찾기"에 대한 비방글을 보며 - 멋진비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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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일도 목사의 영성집회(다일영성수련)에 대한 이단시비를 보면서

 

미주 크리스찬투데이에 어느 사모와 목사가 최일도 목사의 영성집회(다일영성수련)에 참여하고 와서 이 집회에 대해 이단의혹을 제기하는 글을 올렸다. 최일도 목사가 교계의 유명인사이다 보니 파장이 좀 있는 것 같다.

 

최일도 목사의 집회에 대해 전모를 접해 보지 않은 상태라 단정지어 말하기가 좀 조심스럽긴 하지만, 일단 내가 이분들의 글에 대해 느낀 대체적인 인상은 이들의 의혹제기가 다분히 표피적이며, 자신들의 강한 선입견에서 비롯된 측면이 적지 않아 보인다는 것이다.

 

1. 최일도 목사가 자신을 북극성이라 칭했다?

 

언뜻 보기에 '두 증인' 운운하는 아무개 교주가 떠오를 수도 있겠지만, 두분의 글에 따르면 집회참가자들도 별칭을 사용했다. 집회에 별칭을 사용하도록 한 것은 다분히 익숙한 일상성으로부터 탈피하고 인도자의 가르침을 따라 새로이 자신을 돌아보도록 한 기제로 보인다.

북극성이라는 별칭을 썼다고 곧 교주가 된다며 참소하는 행태는 이를테면 '푸른나무'라고 필명을 쓰면 그 사람이 자칭 사람이 아닌 나무라고 했으니 사람같지 않다고 헐뜯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2. 예수님이 화를 내신 적이 있다? 없다?

 

이분들은 예수님이 화를 내신 적이 없다는 최일도 목사의 말을 꼬투리잡고 있다. 아마 성경해석이 틀렸다고 말하고 싶었던 것 같다.

 

예수님이 화내신 적이 있는가, 없는가? 두 가지 측면을 함께 생각할 수 있다. 있다고 한다면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의 거룩한 분노를 나타내는 기록을 가리키는 것이요, 없다고 한다면 이 분노는 사람을 죽이려는 악독한 육적 분노를 가리킨다. 최일도 목사는 당연히 후자의 뜻으로 말하면서 집회참석자들에게 육적 분노를 품을 일이 아니라고 말하고자 한 것이지 성전심판기사를 부정하려는 뜻이 아니었음은 물론일 것이다. 최일도 목사의 말은 더도 덜도 말고 이 상황과 의도에 비추어 알아들으면 될 성질의 발언이다.

 

이에 비해, 육적 분노를 품은 일이 분명 있는 참석자들 가운데 있었던 두분은 약속이라도 한듯이 이 말을 문제삼아 예수님을 로보트처럼 만드는 거짓된 가르침 운운한다. 이게 도대체 번지수가 맞는 얘기라고 생각하는가? 얼토당토 않은 비약에서 살벌한 속내가 풍겨난다는 게 슬플 따름이다.

 

3. '나는 누구인가'에 대해 '나는 용서받은 죄인 / 하나님의 자녀입니다'는 오답?


아마 이분들이 가장 강렬한 거부감을 표시하는 대목이 아닐까 싶다. 최일도 목사는 이러한 '모범답안'들을 두고 '이게 다 교회에서 세뇌시킨 것'이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우선 고려할 점은 집회에 참여한다는 것은 그 집회에 세팅되어 있는 소통방식을 받아들인다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소위 은혜받았다는 것은 집회의 소통방식을 통해 소통이 활발하게 되었다는 것에 다름없다. 아울러, 현재 한국교회에서 익숙하게 통용되는 방식의 집회가 반드시 성경의 정신과 일치하는 정답은 아니라는 점도 유념해야 할 것이다. 오히려 한국교회의 일반적인 집회방식이 심히 자본주의에 찌들어 있는 싸구려 영성을 부추기고 있지는 않은지 고민해 봐야 할 시점이기 때문이다.

 

최일도 목사의 영성집회(다일영성수련)는 일반적인 부흥성회나 사경회 혹은 기도집회와는 소통방식이 다르다. 별칭을 사용하는 세팅 자체가 그것을 드러내준다. 그러나 이것 자체로부터 선험적으로 비성경적이라고 매도할 수 없다. 적어도 해당집회가 세팅해놓은 소통방식과 그 기제의 맥락에서 소통과정을 되짚어 보아야 할 것이다.

 

최일도 목사는 마치 선승이 화두를 통해 수련생과 소통하는 것과 같은 소통과정을 의도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거듭 환기해 두거니와, 이를 '혼합주의'라고 성급하게 단정하고 매도하기 전에, 소통과정이 가리키는 바를 따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내가 보기에, 소통과정을 통해 최일도 목사가 의도했던 바는 이런 게 아닐까 싶다. 교회에서 일상적으로 통하고 있는 용서받은 죄인이나 하나님의 자녀와 같은 표현들이 실은 일종의 종교적 가면일 수 있다. 내가 그렇다고 공식적으로, 명목상으로는 굳게 믿고 있고 심지어 견고하게 내면화하기까지 하더라도 과연 실질적으로도 그런가? 아마 나는 결단코 실질에 있어서 정말 그렇고 추호의 거짓도 있을 수 없다고 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마르틴 루터가 격렬한 영적 순례를 거쳐 칭의의 복음을 통해 하나님과 화해한데 비해, 찌르면 툭하고 나오는 정식화된 후세의 문답은 일종의 자동화된 신(deus ex machina)과도 같아서 종교적 가면으로 오용되는 기제일 가능성이 높다. 한국교회에 그런 종교적 가면을 쓰고 다니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렇다면, 내가 용서받은 죄인 혹은 하나님의 자녀라는 답변이 세뇌에 따른 거짓답변일 가능성도 높다. 최일도 목사는 이런 밋밋하고 평면적인 기술방식에 의한 문제제기 대신 나름의 실험을 시도하고 있는 것 같다.

 

'당연한 모범답안'을 녹음기처럼 되풀이하기 전에, 그걸 녹음기처럼 되풀이하는 것을 세뇌라고 하는 데 반발하기 전에, 이 점을 돌아보는 게 이 집회에서 세팅된 소통과정에서 당연한 순서가 아닐까?

 

4. 혼합주의?

 

그렇다면 혼합주의에 대한 의혹은 어떤가?

 

- 우선, 최일도 목사의 집회에서 동양음악이 명상 혹은 묵상을 위해 사용되었던 것 같다. 이걸 두고 초혼음악 운운하는 것은 동양음악에 대한 모독이기도 할 뿐 아니라 중대한 거짓증언일 수 있다는 점을 지적해둔다. 왜냐하면, 그 음악이 정확하게 초혼을 위한 음악인지 확인해 보고 하는 의혹제기인가? 아니면 WCC에서 정현경이 초혼제를 지냈다는 얘기를 WCC에 가입한 통합교단 소속으로서 영성훈련집회를 한다는 목회자에 끌어들여 빨간 색깔을 덧칠한 것인가? 동양음악을 경건한 시간에 쓰면 안 된다는 신학적 근거는 도대체 무엇인가? 새벽기도 때 교회 음향시설에서 흔히 흘러나오는 세미클래식풍의 잔잔한 음악이거나 CCM이나 찬송가가 아니면 과연 혼합주의인가? 집회참가자가 동양음악을 듣고 익숙치 않아서 은혜가 안 되었다면 그건 그럴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러나 이걸 두고 혼합주의 운운하며 이단시비를 건다면 또 다른 차원의 문제가 된다는 점을 유념해야 할 것이다.

 

- 그렇다면 불교의 선문답이나 가톨릭의 영성수련에서 형식이나 내용을 따오는 것은 어떤가? 명백한 혼합주의가 아닐까? 오히려 나는 되묻고 싶다. 초대교회는 헬라사회에 유행하는 로고스론을 비롯한 수많은 종교적 개념을 수용했고, 아우구스티누스는 신플라톤주의를 수용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저주받은 이교도' 이슬람의 아베로이스주의적 주석을 통해 재발견된 아리스토텔레스철학을 수용했다. 어떤 사람들이 금과옥조로 떠받들고 있는 17세기 개신교 정통주의조차 종교개혁자들의 뜻에 거슬리게도 다시 이 아리스토텔레스철학을 수용했다. 이런 게 바로 혼합주의가 아닐까? 그보다도 성경으로 거슬러 올라가서, 사도 요한은 로고스론을 원용했고, 사도 바울조차 선교와 설교에서 이방시인과 철학자를 인용했다. 이런 게 바로 혼합주의가 아닐까?

 

5. 종교다원주의?

 

최일도 목사에 대한 의혹제기 글들은 위에 열거한 것과 같은 거슬리는 부분을 토로하다가 별안간 '종교다원주의'에 대한 혐의로 비약한다. 나아가, 최일도 목사 자신이 여기에 대한 질문에 별 답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침묵으로부터 또 뭔가를 추론하면서 종교다원주의냐 참 신앙이냐를 선택해야 할 시점을 운운한다.

 

하지만 말은 바로 하자. 결국 영성수련은 곧 혼합주의요 종교다원주의라는 자신들의 기존 선입주견이 튀어나온 것 아닌가?

 

이들이 최일도 목사에게 혼합주의에 덧붙여 종교다원주의의 혐의까지 씌우게 된 까닭은 결국 성경을 들고 들어가지 못하게 한다든지, 죄와 회개, 예수님과 성령님에 대한 종교적 상징과 언어를 언급하지 않는다는 식의 극히 표피적인 문제이다.

 

표피적으로 하나님, 예수님, 성경을 들먹이고 과시하는게 그토록 문제라면 교회 내에서 명시적으로 하나님, 예수님, 보혈과 같은 말을 들먹이지 않으면서 행해지고 있는 수많은 내적 치유 강좌와 심리학적 기법을 수용한 상담도 모조리 이단으로 '찍어내 버려야' 하지 않을까?(*1)(*2)

 

사실 이런 혐의제기방식은 꽤 낯이 익다. 예전에도 문익환 목사에 대해서 민주화운동을 하면서 보혈이니 십자가니 하는 말을 하지 않았다고 해서 목사도 아니라는 식의 이단시비가 있었다. 사실은 민주화운동을 비겁하게 외면하고 로마서13장 운운하면서 독재정권과 결탁한 그 사람들이 무언가에 눈이 멀어 있었던 사람들이 아닌가? 남들이 눈 멀어 있다고 힐난하지만 정작 자신들이 무언가에 눈이 멀어 있다보니 표피적인 문제제기를 하게 되는 것은 아닌지 스스로를 먼저 돌이켜 보는 게 좋을 듯 싶다.(*3)

 

끝으로 한 가지, 미주 크리스찬투데이는 홈페이지를 둘러 보면 상당한 보수성향을 대변하는 것으로 짐작된다. 미주 다일공동체 대표의 반론도 있었던 것 같은데 이 글은 눈에 띄지 않고 검색해도 나오지 않고 있다는 점은 최일도 목사에 대해 일정한 방향의 메시지를 표시함으로써 이단시비로 흠집을 내겠다는 속내가 풍겨 나오는 대목이어서 주목해 두지 않을 수 없다. 나아가, 최일도 목사 개인에 대한 시비를 넘어, 관상기도가 혼합주의, 종교다원주의라는 이유로 보수교단들에서 이단으로 단죄되도록 하기 위해 군불때우기 하시고들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의문도 당연히 품게 된다.

 

부디 그렇지 않으시기를 빈다. 그건 우리 한국교회는 답이 없는 근본주의자들의 집합체요 하고 세계교회 앞에 떠들고 다니는 '제얼굴에 침 뱉기'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특히 영적 분별력 운운하면서 성경과 종교에 대한 표피적인 선입견을 전가의 보도처럼 휘두르는 분들, 먼저 제 눈의 들보부터 보셨으면 좋겠는데 절대 안 들으실테니 참 답답하다. 들을 귀 있는 분은 제발 좀 들으시라.



[덧붙임]

(*1) 최일도 목사가 '맑은 물 붓기'라는 화두를 통해 마음 속 원망들을 털어버리는 훈련을 하도록 했으니 십자가의 보혈이 언급되지 않은 혼합주의이고 종교다원주의라는 식의 비난도 황당하긴 매한가지다. 이런 식의 꼬투리잡기라면 무엇을 건들 문제가 없겠는가? 형제에게 원망들을만한 일이 있을 때 예물을 놓아두고 형제와 먼저 화해한 다음 예배드리라는 주님의 말씀을 들은 당시 사람들을 생각해 보라. '주의 보혈로', 혹은 '예수의 이름으로' 화해했을까? 그런 교리의 정당화가 아니라 주의 말씀을 듣고 형제와 화해한 사람이 주의 뜻을 따른 사람이 아닌가? 원망과 분노를 털고 형제와 화해하는데 '주의 보혈과 십자가'를 들먹이지 않으면 혼합주의요 종교다원주의인가? '주의 보혈과 십자가'를 들먹이면서 갈등과 증오를 부추기는 행태야말로 오히려 비복음적, 비성경적인, 따라서 악마적인 것은 아닌지 생각해 봐야하지 않을까?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마태복음721)

(*2) 게다가 인터넷에 올라온 이 동영상을 보면 최일도 목사가 이 집회()에서 이단시비자들의 주장처럼 과연 예수님, 성령님을 언급하지 않았는지 그것부터 우선 짚어 보아야 할 것 같다.

(*3) 문제의 글을 올리신 사모는 '최일도 목사가 벗님들에게 보내는 편지'라는 글에 대해서도 노골적인 매도를 하셨다. 최일도 목사에 대한 그의 공개적인 매도의 요지는 율법과 은혜의 이분법은 기독교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런 글을 쓰고자 한다면 당연히 갖추어야 할 최소한 신학적 소양마저 없다는 것을 스스로 폭로하는 글이다. 율법과 은혜의 이분법은 마르틴 루터가 재발견한 바울신학의 핵심에 속하기 때문이다. 루터나 바울이 비기독교적이라고 참소하는 것과 다름없이 터무니없다.


Posted by 다일공동체

눈감으면 제2의 고향, 설곡산으로 달려갑니다.

                                                                  / 김영진장로(전주성암교회)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11-28)라는 말씀이 절실할 때가 있었습니다. 세상에서 지치고 피곤하여 희망의 빛이 보이지 아니할 때 쯤 설곡산 다일공동체에서 아름다운 세상을 찾아가는 영성수련이 있다는 것을 QT지인 생명의 삶” (20064월호)에서 보았습니다. 한 주간 동안 모든 근심과 슬픔, 불안과 걱정을 내려놓고 나는 누구인가? 네가 어디 있느냐? 네가 무엇을 보느냐? 등을 물으며 찾아간다는 영적우주여행이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습니다. 벼르고 별러 1단계 아름다운 세상찾기’ 112기로 설곡산을 찾아갔습니다. 그간 기도원이나 신앙집회에 여러 번 참여하였던 경험이 있었던지라 기대 반, 아님 공기 맑은 깊은 산속에서 심신수련이라도 한다는 생각이었는데 우주여행은 대기권을 넘어 성층권으로 돌파하는 단단한 껍질 속에 갇혀 있던 나를 사정없이 깨트리고 무너뜨리는 고되고 힘든 여행이었습니다. 그간 허상만을 좇아 남의 탓만을 하면서 살아왔던 자신이 원망스럽고 부끄러웠습니다. 보잘 것 없는 자존심으로 내가 누구이관데하며 거드름을 피우며 살아왔던 날들이 허물처럼 벗겨지는 순간들이었습니다. 모든 실상들은 자신으로부터 만들어지는데 내가 만들어 놓은 굴레 속에 자신을 얽어놓고 이웃을 원망하고 탓하고 자학을 하였던 지난날의 모습이 적나라하게 스쳐가는 것이었습니다. 생각의 틈새를 벌려놓으니 깨달음에서 스며오는 내면의 자유, 기쁨과 환희! 수련을 통하여 그간 짓눌린 정신적 구속에서 벗어나 참 자유인이 되었습니다.

이를 위하여 예수님의 사랑과 열정으로 소명과 사명을 다하시는 길 안내자 북극성 최일도목사님, 등대 김연수사모님, 모세 원장님, 스데반수사님, 그리고 설곡산 가족들, 우주선 영성도우미, 진지도우미까지 잊을 수 없는 귀하고 소중한 분들이었습니다. 특히 어리석고 아둔한 수련생들을 깨어나게 하기 위하여 마지막 피 한 방울이 소진될 때까지 몸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열강하시는 북극성님의 헌신은 눈물이 날 정도였습니다. 우주선에서의 시간 시간마다의 감동과 깨우침, 영성도우미들과 진지도우미들의 기도와 배려, 섬김이 수련생들을 존귀한 지체로 만들어가는 시간들이었습니다. 직장과 교회와 사회에서 이토록 열심과 열성을 다하여 섬김으로 살아간다면 무엇인들 이루지 못하고 무엇인들 못할까라는 생각을 하면서 감동을 받았습니다. 진실 된 마음으로 사랑을 나누고, 상처 받고 찢긴 가슴들을 어루만져 주면서 위로하던 시간들이 새록새록 생각이 납니다. 눈물로 콧물로 아픈 상처를 씻어주고 치유하던 시간들, 세상을 살아가면서 아픈 것들은 어찌 그리도 많고, 풀을 수 없는 원망과 쓴 뿌리를 가슴에 담고 살아가는 형제들이 많은지, 때로는 그 아픔과 상처가 나에게 위로가 되었습니다. 형제들의 아픈 가슴을 쓸어내리면서 나는 행복하다.’ 나는 진정 행복하구나.‘를 외쳤던 시간들. 이제 마음속에 차분히 가라앉아 깊은 생수의 강으로 흐릅니다.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돌아다보면 그 무더운 여름 폭우와 함께 뜨거운 성령으로 달구었던 1121단계 아름다운 세상찾기’, 한파에 이은 폭설로 노동기도와 함께 진행되었던 342단계 작은 예수 살아가기’, 추운 겨울 벌거벗은 나무사이 눈 덮인 오솔길로 응답봉을 오르내리며 은밀히 하나님 교제하였던 12하나님과 동행하기모두가 잊을 수 없는 귀한 시간들이었습니다.

무엇보다 소중한 것은 역할을 바꾸어 진지도우미로 섬기는 일이었습니다.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20-40)라고 하신 말씀을 받들어 도우미에 임하였습니다. 섬김을 받는 것보다 작은 정성으로 누군가를 섬기는 일들이 더 은혜가 되고 기쁨이 되었습니다. 딱딱한 껍질을 깨고 병아리가 나오듯이 수련생들이 우주선에서 깨어 참 자유를 누릴 수 있도록 육의 양식으로, 기도로 섬기는 일들이 귀한 사역이 되었습니다. 오히려 섬기는 도우미들이 성화되어 갔습니다. 주방에서 은혜를 받고 깨어지는 역사가 일어나 섬기는 기쁨을 누리는 시간의 연속이었습니다. 또한 하늘나라의 작은 도구로 쓰일 수 있다는 확신과 충만함이 잔잔한 기쁨으로 넘쳐오는 것이었습니다. 지금은 그 기쁨을 만끽하기 위하여 시간을 만들어 진지도우미로 달려갑니다. 벗님들도 진지도우미로 섬김의 기쁨과 축복을 맛보시기 바랍니다.

눈을 가만 감으면 설곡산이 선명히 그려집니다. 전주에서 고속버스를 타고, 강남 터미널에서 지하철을 타고, 잠실에서 7000번 버스를 타고, 설악에서 하차하여 구불구불 찾아가던 길, 길 끝 가장자리 숲속에 아늑히 자리한 다일영성수련원! 사랑이 있고, 섬김이 있는 곳, 항상 어린아이와 같이 환히 웃으시며 반겨주시는 모세 원장님을 비롯하여 형제, 자매님, 내가 사랑하는 가족들이 있는 곳입니다.

설곡산 다일공동체는 쉼과 평안이 있는 곳입니다. 세상에서 고통 받는 자들의 고향입니다.

죄로 죽을 수밖에 없는 자들의 고향입니다. 우리들의 영혼이 편안히 머물 수 있는 안식처입니다. 싸매주시고 고쳐주시는 주님으로부터 치유함을 얻을 수 있는 곳 영원한 나의 고향입니다. 그 설곡산으로 지금 달려갑니다.

사랑합니다. 축복합니다. 아름다운 세상입니다.

Posted by shineka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