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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달 동안 함께 살았던 너희들과의 생활을 정리하고 비행기 타고 한국에 왔다. 돌아온 현실은 이것 저것 잴 것이 많단다. 5개월의 짐은 하루 이틀이면 쌀 수 있지만 마음이란 쉽지 않더구나. 아직도 눈을 뜨면 갈색 톤의 그곳이 아른한데, 이곳에서 살아낸다는 게 내가 내 삶을 살기보다는 둥둥 떠 다니는 느낌이다.

처음에는 어떻게 지냈는지 잘 기억이 안 난다. 공동체 생활을 해 본 것도 처음인데, 나 하나 건사하지 못하는 내가 이모로서 너희들에게 책임감을 가져야 한다니. 이렇게 많은 사람들의 눈길이 나를 향해 있는 경험을 하지 못했어. 나에게도 시간이 필요했지만 너희들과 함께하기 위해서라기보다는, 내가 이 곳에서 무엇을 얻어갈 수 있는지를 먼저 생각했다. 지금의 나라도 감당할 수 없는 일을 겪은 너희들을 내가 가진 상식으로 판단하려 했고, 원하는 결과가 나오지 않음을 이해하지 못했다.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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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순간부터 내가 여기 온 이유도 나를 위해 무엇을 한다기보다는 너희들과 함께 하기 위해서라는 생각이 들었다. 너희들 속에 내 자리가 없는 것에, 너희들을 탓하기보단 너희들에게 내 진심이 향해 있는지를 되묻게 되었어. 그러니 '너 중국 가서 뭐했냐'라고 물었을 때, 반드시 답해야 할 것 같았던 가시적인 성과에 대한 조급함이 사라지더라. 하루 하루 함께 삶을 이어간다는 것 자체가 귀중한 것일 뿐더러, 시간은 서로를 적응하게 만들더구나. 아, 이제야 너희들과 함께 산다고 여길 때 '내 평생 언제 이렇게 몸과 마음이 편안한 생활을 할 수 있을까' 할 정도로 즐겁고 행복했다.

아쉬운 것은 말이다. 마지막까지, 머리는 아는데 가슴은 늦더라. 적극적으로 너희들에게 다가가지 못했다. 그것이 너희가 나에게 필요로 했던 것이지만, 부끄럽게도 오히려 내가 너희들로부터 더 많은 안식과 기쁨을 얻었다. 그런데도 내가 가진 너희를 향한 내 마음을 힘껏 드러내진 못했다. 모든 감정을 쏟아내면 나중에 주워 담기가 더 힘들 것 같아서.

눈물 보이지 않고 웃으며 쿨하게 떠났지만, 미치도록 그립구나.

1월 23일 짧은머리(头发) 이모가

Posted by 비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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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강대학교 신문방송학과 윤자혜

- 대사협 해외봉사단 캄보디아1팀 '러브깜디' 부리더

대학교에 들어올 때까지 나에게는 '대입'이라는 확고한 목표가 있었다. 그러나 대학생이 된 후 인생의 목표가 없어졌기 때문에 여름방학의 나는 시간을 흘러가는 대로만 보내고 있었다. 그렇게 무의미하게 보내는 시간들을 없애기 위해서 2009년 2학기에 이것저것 많은 활동들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그 연장선상에서 해외봉사에 지원을 했던 것이었다. 다른 단원들처럼 자신의 꿈을 위해서라거나 어떠한 성취감을 위해서 지원한 것이 아니었다. 그냥 특별한 활동을 해보고 싶었고 시간을 허비하고 싶지 않았을 뿐인데, 그 끝에 해외봉사가 있었다.

그랬었기 때문에 나는 다른 단원들과는 달리 준비과정에서 설레고 들뜨는 마음이 미미했던 것도 사실이다. 출국하루 전, 아니 인천공항에서 출국 심사를 받을 때까지만 해도 지금 내가 어디로 향하고 있는 것인지 실감이 나질 않았다. 과연 낯선 캄보디아의 땅에서 계획한 대로 잘 활동하고 돌아올 수 있을지 확신조차 들지 않았다. 더군다나 한국으로 입국하게 됐을 때 스스로가 어떻게 변화했을지는 상상도 하지 못한 채 캄보디아의 땅을 밟았다.

우리가 했던 봉사는 크게 '밥퍼, 빵퍼봉사', '지역봉사', '교육봉사' 이 세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빵퍼봉사는 개인적으로 스스로를 가장 많이 반성하게 하고 많은 울림을 주었던 활동이었다. 점심식사를 다 하고 나서 빵이 나올 시간이 되면 그 앞에서 기다렸다가 간식으로 소보로 빵 하나를 꼭 챙겨먹었었다. 봉사하던 마지막 날,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빵퍼봉사를 다녀오게 되었다. 그 곳에서는 아직 초등학생도 되지 않은 수많은 아이들이 소보로빵 하나를 받기 위해 필사적으로 달려오고, 하나를 더 얻기 위해서 마치 받지 않았다는 듯 순진한 표정으로 받은 빵들을 다리 밑에 숨기고 옷 속으로 숨기는 모습에서 차오르는 눈물을 도저히 버텨낼 수가 없었다. 이렇게 어린 아이들이 살겠다고, 정말 목숨을 부지하겠다는 그 목적 하나만으로 이런 행동을 하는 것을 보면서 여태 내가 도대체 무슨 만행을 저지른 것인지 미안하고, 미안하고 또 미안해서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이 아이들에게는 절실한 주식인 식량을 나는 아무렇지도 않게, 사실은 먹지 않았어도 되는 그런 간식에 불과했을 뿐인데, 그것을 하나라도 더 먹겠다고 눈치를 보고, 더 많이 먹을수록 내 포만감에 뿌듯해했다는 사실이 너무 부끄럽고 창피했다. 아직까지도 고작 내 욕심 때문에 몇몇 아이들의 주식을 빼앗았다는 죄책감이 너무나도 크게 나를 죄어온다. 동시에 내가 얼마나 축복받고 혜택 받은 사람인지, 지금 내가 하는 고민들은 당장 오늘 하루의 끼니와 직접적으로 관련된 절박한 것은 아니지 않은가. 한국으로 돌아가더라도 이 아이들의 눈빛을 행동을 절대 잊지 않고 실질적으로 그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일을 하겠다고 결심을 굳힌 것이 이 때였다.

한국에서 가장 열심히 프로그램을 짜고 준비해 간 것이 교육봉사이기 때문에 가장 많이 기대했던 부분이기도 하고, 우리가 아이들에게 이만큼을 가르쳐 주면 그것에서 뿌듯함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런 것보다 색칠을 하고, 풀을 붙이고, 사진을 찍을 때 즐거워하고 행복해하는 아이들의 표정이 나까지도 행복하게 만들었다. 실상 우리가 가르친 것은 없는데 그보다 훨씬 더 많은 사랑을 받고 온 것만 같아 부끄럽고 염치없다.

이러한 활동들을 통해 봉사에 대한 생각이 굉장히 많이 바뀌었다. 이전까지는 남을 돕기 위해 내 것을 베푸는 것이 봉사라고 생각했었다. 그렇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시간적, 경제적인 여유가 없어서 봉사를 실천하지 못한다는 말에 동의했었다. 그러나 이번 활동을 통해서 봉사라는 것은 내가 나누어 줄 수 있는 것이 넘쳐나기 때문에 행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이 필요로 하는 것을 채워주기 위해서 행하는 것임을, 그리고 그것을 통해서 일방적으로 내가 퍼주는 것이 아니라 '봉사'라는 매개체를 통해 우리가 소통하고 있는 것임을 깊이 깨달았다.

개인적으로는 스스로를 돌아보고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미래를 설계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꿈같았던 14박 15일이었고 평생토록 잊지 못할 경험이었다. 캄보디아에서 돌아온 지 불과 3일밖에 되지 않았는데도 그 소소한 일상 하나하나가 너무 그립다. 매일 아침 우리를 숙소에서 유치원으로 실어 나르던 트럭, 오븐에서 나오자마자 나는 소보로빵의 고소한 냄새, 너무 매워서 혀끝을 얼얼하게 했던 간장 속의 고추, 센터에 도착하자마자 쪼르르 달려와 안기던 아이들과 손을 잡았을 때의 그 촉감, 손만 맞대주어도 하이파이브를 하며 신나했던 아이들의 그 웃음, 도색작업 시 롤러를 밀면 났었던 '쩍~쩍' 거리던 소리, 심지어는 센터에서 숙소를 오갈 때 코를 찌르던 생선 말리는 냄새까지도. 그 모든 날들이, 그 일상들이 너무 그립다.

출국하기 전에는 뿌옇던 모든 것들이 이젠 다 그 빛을 찾았다. 봉사, 행복, 사랑에 대한 나의 가치관, 나아가서 앞으로 내 삶의 방향을 어디로 잡아야 할지 알게 해 주었다. 내 인생에 전환점을 마련해 준 우리 러브깜디 단원들, 단장님, 간사님, 유치원과 센터의 아이들, 그리고 다일공동체의 모든 관계자 여러분들에게 진심으로 감사하고 또 사랑한단 말을 전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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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지대 정치외교학과, 사회봉사단 김도현

- 대사협 해외봉사단 캄보디아1팀 '러브깜디' 리더

내가 다일과 함께 캄보디아로 떠난 건 어쩌면 필연이었는지도 모르겠다. 10월 초쯤 최일도 목사님께서 명지대학교에 채플강연을 오신 적이 있다. 그때만 해도 다일에 대해 잘 알지 못했고, 그저 밥퍼운동을 시작하신 분 정도로만 어렴풋이 알고 있던 시기였다. 하지만 그날 최 목사님께서 보여주신 한 편의 영상은 내 가슴을 심하게 요동치게 만들었다. 바로 캄보디아 빈민촌의 참담한 현실과 구순구개열 아이들이 한국에 와서 수술 받는 모습을 담은 영상이었다. 영상을 보는 내내 차오르는 눈물을 견디기 힘들었고, 보다 많은 학우들에게 보여주고 싶다는 생각에 강연이 끝난 후 목사님을 찾아갔다. 목사님께선 작은 종이에 정성스레 어떤 목사님의 휴대전화 번호를 적어주셨고, 이내 두 손 맞잡으며 '고맙다'고 말씀하셨다.

'꼭 한 번 다일에서 봉사하고 싶다. 저 아이들을 꼭 만나보고 싶다.'

이것이 그날부터 시작된 나의 작은 소망이었다.

그렇게 다일과 처음 인연을 맺고 얼마 후, 대사협 해외봉사단 모집공고를 접했다. 10개국 14개 지역 가운데 '캄보디아-다일공동체'가 있었던 건 놀라운 일이었고, 난 결코 주저하지 않았다. 그리고 대사협 해외봉사단 캄보디아1팀의 단원이 되어 11월 26일 다일과 두 번째 만남을 가졌다.

캄보디아에서 보낸 2주간의 시간은 첫날부터 마지막 순간까지 짠한 감동이자 눈물이었다. 첫날 '밥퍼'를 할 때였다. 거의 모든 아이들이 다 헤진 비닐봉지를 움켜쥐고 있는 것을 보고 이상하단 생각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배식을 시작하고, 아이들의 손을 잡고 빈자리로 데려다주면서 곧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대여섯 살 쯤 되었을까, 한두 살 어림직한 동생을 꼭 품에 안은 남자아이가 있었다. 근데 그 어린 녀석이 자기 식판에 담긴 밥은 그 너덜너덜한 봉지에 옮겨 담고, 동생 입에 밥을 떠먹이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루 1달러로 온가족이 생활한다는 캄보디아의 빈민들, 그 어린 꼬마가 집에 있는 가족을 위해 자신은 굶고 동생만 밥을 먹였던 것이었다. 그 모습에 얼마나 가슴이 아팠는지, 그 녀석의 손을 꼭 붙잡고 눈물을 흘렸었다.

캄보디아에서의 일정이 거의 끝나갈 무렵, 어느새 달라진 나의 모습을 발견한 것도 감동적이었다. 누가 봐도 더러운 아이들, 한국에 있었더라면 피해 다녔을지도 모를 아이들인데, 어느새 그 아이들이 먹던 빵을 한입씩 나누어먹는 내 모습을 보면서, 이젠 눈앞의 더러움보단 그 속에 숨은 사랑이 먼저 보이는 듯해 감사하단 생각이 들었다.

공에 맞아 눈을 다친 단원에게 직접 밥을 떠먹여주던 아이, 고된 작업에 잠시 쉬고 있을라치면 금방 달려와 어깨를 주물러주던 아이, 내 품에 안겨야만 웃어주던 갓난아이, 들꽃을 묶어 예쁜 꽃다발을 선물해준 아이, 겨우 사탕 하나에도 두 손 예쁘게 모으고 '어꾼'이라 말하던 아이들, 겨우 세 번 배운 리코더로 멋진 합주를 해낸 아이들, 두 팔 벌리고 소리치면 후다닥 달려와 내 품에 안겨주던 아이들, 먼저 마지막을 알고 내 품을 떠나지 않았던 그 사랑스러운 아이들…. 하나하나 말하자면 끝도 없을 캄보디아에서의 아름다운 기억들.

우리가 러브깜디란 이름으로 캄보디아에서 행한 가슴 뜨거운 일들, 다일이 하나님의 사명으로 캄보디아에서 행하는 가슴 따뜻한 일들, 이 모든 것들이 시작은 미약할지나 세상을 따뜻하게 울리는 큰 메아리로 울려 퍼질 것을 난 의심치 않는다. 그리고 나 역시 더 많이, 더 크게 쓰임 받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다짐했다. 비록 짧은 시간이었지만, 나에게 이처럼 아름다운 젊음을 선물해준 다일과 대사협, 러브깜디 모두에게 가슴 가장 밑바닥에서 우러나오는 고마움과 뜨거운 사랑을 전하고 싶다.

"감사드립니다. 이처럼 아름다운 젊음을 만끽할 수 있도록 해주셔서."

Posted by 비회원